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희 Aug 23. 2019

싸이월드는 했지만 인스타그램은 안 하는 이유

어른의 SNS에 ‘있어빌리티’는 필수?

우리의 SNS에는 수많은 우리가 담겨 있다. 돌이켜 보면 나의 첫 SNS는 약 20년 전에 시작되었다.

1989년생. 아주 어렸지만 다행히도 컴퓨터의 등장, 그 어마어마하고 찬란했던 시대를 기억하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으로 컴퓨터부에 들어 타자 치는 법이나 인터넷 접속법 같은 것을 배웠고, CD 대신 플로피디스크에 파일을 담아 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친구들과 함께 컴퓨터실에서 인터넷을 하다가 어떤 커뮤니티에서 만난 동갑내기 서울 아이와 '랜선친구'가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펜팔을 주고받았고 가끔은 통화도 했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나긋나긋한 서울말에 귓가가 간지러워져서는 동네 친구와 마주 본 채 키득키득 웃곤 했다. 그것이 아마도 나의 첫 #소통 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 온라인은 엄청난 속도로 발달했고, 소통은 점점 쉬워졌다.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기 위해 색색의 볼펜을 사고, 혹시라도 떨어질까 꾹꾹 눌러 우표를 바르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됐다. 그렇게 급속도로 발전하는 세상에 따라 나도 점점 자라났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싸이월드’라는 인터넷 사이트가 생겼다.

우리는 각자의 ‘미니홈피’를 정성 들여 꾸미고, 새벽이 올 때까지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었다. ‘왜’ 인지도, ‘무엇 때문에’ 인지도 모를 그 일들이 그저 참 재미있고 소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싸이월드 갬성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스마트폰의 활성화로 인해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이 생겨나며 우리는 바야흐로 ‘본격 SNS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각자만의 방식으로, 그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현재 싸이월드는 재단장 중.


SNS에서 나의 근황을 전하거나 또는 전시하기도 하고, 전화 대신 SNS로 안부를 확인하는 일이 잦았다. 몇 년 전, SNS를 일절 하지 않는 한 고향 친구에게 ‘너는 왜 인스타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냥, 귀찮아서. 하고 대답했다. 나는 다시, ‘근데 너 옛날에 싸이도 하고 미니홈피도 하지 않았어?’라 물어봤다. 그러자 친구가 털어놓은 말.

“그냥 SNS 하면 애들이 다 좋은 것만 올리잖아. 다들 취직해서 일 잘하고 있는데, 내 처지가 이렇다 보니 막상 SNS 한다고 해도 올릴 것도 없고, 솔직히 다들 잘 된 거 보는 게 힘들기도 하더라고."

당시 친구는 2년째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중이었고, 다른 친구들과는 연락도 많이 주고받지 않는 상태였다. 생각해보니 SNS는 가끔, 꺼려지는 누군가와의 소통을 강요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인스타그램 대신에 싸이월드를 했던 그 시절, 고등학생이었고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내가 보기 싫은 사람, 또는 나를 보여주기 싫은 사람과 일촌을 맺을 일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사람들에게 나를 전시하고, 이른바 ‘있어 보여야 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어른이 된 후는 조금 달랐다. 타인의 눈에 우아하게 보이고 싶은 열망, 그 본능이 본격적으로 피어난 것이다. 적어도 인스타그램이라는 그 프레임 안에서는 말이다.

그래서 별 볼 일 없는 일상에 감성을 잔뜩 발라 재가공한 후 피드에 올리거나, 어쩌다 한 번 있을 고급스러운 일정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셔터를 누르곤 한다. 점심엔 순대국밥을 먹었지만 후식으로 먹은 스타벅스의 커피를 찍어서 올린다든가, 하루하루 육아 전쟁을 치르면서 밤마다 눈물을 훔치면서도 고급 아기띠로 아이를 안고 거울샷을 찍는다든가, 녹화 후 고생한 스태프들과 찍은 사진은 혼자만 간직하지만 연예인과 단둘이 찍은 사진은 꼭 인스타에 올리고 마는. 그런 ‘있어빌리티’는 본인의 삶을 한층 행복하게 하는 동시에, 타인에게는 때로 상실감을 주기도 한다.

한 주변의 예로, 결혼 후 달달한 신혼생활을 매일 인스타에 공유하는 친구 A가 있었다. 집안일 도와주는 남편 자랑에, 여자라서 행복하다는 둥, 자신은 사랑받는 여자라는 둥, 그 사랑의 과시는 정말이지 엄청났다. 주변 친구들의 반응은 보기 좋다, 또는 작작 했으면 좋겠다, 두 가지로 갈렸지만, 제3의 반응이 한 명 있었다.

어릴 때부터 결혼을 무척 일찍 하고 싶어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친구 B였다. A의 행복한 신혼생활을 보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또 가끔은 질투가 나기도, 또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나고 슬퍼지기까지 한다고 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사실 A의 실상은 SNS에서 보이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엄청나게 달달한 신혼생활을 하고 있는(또는 있어 보이는) 그녀는 실은 전쟁 같은 사랑 중이었고, 알고 보면 하루도 안 다투는 날이 없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심지어는 술김에 손찌검까지 당한 적이 있다는 말을 울면서 토로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면 B는 친구의 불행에 기뻐할 것인가. 아니면 가슴 아파할 것인가. 나는 결국 말을 삼켰다.

그 후, 내가 내린 지극히 주관적인 결론 하나. 지나치리만큼 SNS에서 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실제의 삶은 그 반대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행복한 척’은 마음속 행복의 결핍을 뜻하는 것이고, ‘사랑받는 척’은 사랑받고 싶다는 목마름에 가깝다.


#있어빌리티


나의 ‘있어빌리티’는 조금 다른 분야였다.

다행히 명품은 아직 모르고, 여행을 가도 고급 리조트를 찾지도 않고, 양주보다 소주를 좋아하는 취향이기 때문에, 고급스럽게 나를 포장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대신,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유로운 커리어우먼’이 꿈인 나는 ‘있어빌리티’ 대신 ‘바쁜척빌리티’를 해왔다. 한 때는(어쩌면 대부분의 날들을) 프리랜서 작가인 내가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가 나의 능력치를 나타내는 척도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일을 했고, 실제 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노력했다. 종종 SNS에 노트북이나 커피 사진을 찍어 올리고 ‘완전 바쁨’이라고 써놓곤 했었다. 그렇게 바쁘다면서 인스타 할 시간은 있었나 보다.

덕분에 나는 ‘항상 바쁜 애’, ‘쟤 되게 돈 많이 버나 보다’라는 말을 종종 듣기도 하고, 한 동기 언니에게 ‘너 인스타 보니까 여전히 열심히 하더라. 부럽고 대단해!’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그렇게 비치고 싶어 열망했던 것에 비해, 실제 그런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은 그냥, 그랬다.  대체 뭘 위해서 SNS에 비치는 내 모습에 집착을 했던 걸까.

나 또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애꿎은 인스타를 보며 ‘얘는 왜 이렇게 바쁜 거야?’, ‘얘는 요즘 허구한 날 여행만 다니네! 그렇게 벌어둔 돈이 많나?’라고 투덜대기도 한다. 나보다 잘 나가는 친구를 발견했을 때도, 구남친에게 새 연인이 생겼을 때도, 그들은 침묵하지만, 나는 상처 받는다.

우리는 SNS 속 타인에게 상처를 받고, 또 주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나 자신의 열등감이 나에게 상처를 입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은 이것을 차단하고자 인스타그램을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이유 없이 순수하게 나를 기록하고 타인과 소통하고 싶었던 싸이월드 시절의 나. 그리고 나를 보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또한 나만의 잣대로 타인을 판단하기도 하는 인스타그램 시절의 나. 달라진 건 시대의 흐름일까 아니면 나 자신일까.

그러나 인스타는 잘못이 없다. 다만 내가 어른이 되었을 뿐.

그래서 “ㄴr는 ㄱr끔..” #싸이월드가_그립다






매거진의 이전글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나를 기른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