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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희 Jul 12. 2019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나를 기른다면

서른한 살 생일, 새싹을 틔웠다

얼마 전, 서른 번째 생일이 지나고 서른한 살이 되었다. 사람들과 모여 생일 초를 불고 부어라 마셔라 하며 떠들썩한 생일을 보낸 건 딱 재작년까지였던 것 같다.

일 년 중 가장 외로운 날.

그래서 싫은 날. 나에게 생일은 그랬다. 정신없이 일을 하면서도, 또는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쓸쓸한 기분이 들었고, 전화기 너머 "생일인데 많이 바쁘지? 미역국도 못 먹어서 어떡하니."하고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잘근거리곤 했다.

그러길 10년째. 생일의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더욱 외로워질 것'을 택했다. 따라서 작년부터는 생일을 혼자 있는 날이자 나에게 집중하는 날로 정했다.

올해의 생일은 금요일이었고, 갑자기 맡게 된 일 때문에 종일 정신없이 섭외 전화를 돌려야 했다. 업무를 마치고 마트에 다녀와 요리를 하고 생일상에 앉은 시간은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나는 나의 생일, 그리고 외로움을 자축하며 오랜만에 나 자신과 마주했다. 서른한 살이 된 나와는 첫 만남이었다.

마치 나체로 거울 앞에 선 듯 발가벗은 심정으로 지금의 내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말이다. 오랜만에 자세히 들여다본 나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몸과 마음 곳곳에는 시커먼 '콤플렉스 덩어리'들이 흉하게 응어리져 있었다.

이미 여기저기서 병이 진행되고 있다는 걸 알아챈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나는 그 사실을 외면하려 발버둥 쳐 왔다. 그렇게 방치되었던 콤플렉스의 덩어리들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속도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 덩어리를 낫게 하기보다 감추기 위해 애를 썼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 화장품을 겹겹이 덧칠하고, 비싼 옷을 잔뜩 사다 놓고는 수시로 갈아입어대며 요란을 떨었다. 겉모습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하지만 독한 화장품 탓에 가려진 피부는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고, 정신없이 치장하느라 돈을 퍼부었으니 마음에는 잔고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실은 최근 들어 종종, 아니 제법 자주, 마음에 기근이 찾아왔다는 신호를 느끼고 있었다.



20대는 그럭저럭 엉망이었고, 그럭저럭 괜찮기도 했다. 크게 이룬 것은 없었지만 잃은 것도 없었다. 씨앗을 뿌리는 시기라고 생각해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일했다. 수확은 아직 멀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30대가 되자마자 조금은 조급해졌고, 영영 나아지지 않을 것만 같은 현실이 원망스럽기 시작했다. 오히려 10년 전과 비교해 더 안 좋아진 것들. 예컨대 망가진 건강이나 생활습관, 좁혀진 인간관계, 점점 모나져만 가는 성격 등 '20대를 보내며 잃게 된 것'을 굳이 손에 꼽아가며 찾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종종, '나는 왜 이렇게 살았을까'가 아닌, '나는 왜 이렇게 자라났을까' 또는 '엄마 아빠는 나를 왜 이렇게 키웠을까'라며 부모의 탓을 하기도 했다.

어쩌다 이렇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노력 없이도 성과를 볼 수 있을 만한 돈과 비상한 머리를 가지지 않았을까. 왜 이렇게 끙끙대며 살아야만 하는 배경을 가진 걸까. 평범한 집안, 평범한 외모, 평범한 성장기. 난 왜 이렇게 생겨먹은 건지, 모든 것이 못마땅해 스스로와 부모님을 비관했다. 심지어는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할 걸, 이라는 말 대신 부모님은 왜 나에게 공부를 더 시키지 않았을까, 라는 말로.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르게 살았을까, 라는 말 대신 부모님은 왜 나에게 올바른 생활습관을 심어주지 않았던 걸까, 라는 말로. 내가 이렇게 자라난 것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다.

한 번은 동료들과 '이름'을 가지고 누가 더 불행한지, 한참을 얘기한 적이 있다.

누군가는 이름이 너무 흔해서 같은 학년에 자기와 같은 이름의 친구가 일곱 명이나 있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이름이 너무 남자 같아서 싫다고 했고, 누군가는 어느 유명 여배우와 이름이 같아서 놀림거리가 되거나 손해 보는 일이 있다고 했다. 나는 이름이 너무 여성스럽고 기가 약해서 싫다는 말을 보탰다. 자신의 이름이,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온 삶이 불리했던 이유는 각양각색이었고 또 주관적이었다. 이렇듯 이름처럼,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원망은 더욱 크다. 이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

나는 그렇게 모난 모습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다른 형태의 부모. 다른 형태의 가정환경. 다른 형태의 성격이지만, 계절도 시간도 모두에게 공평하게 흘러간다.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시야에 어떤 것을 담을지는 오롯이 본인의 선택이다.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낼지, 꽃과 하늘을 바라볼지, 아니면 대상 없는 미련한 원망으로 눈을 가리고 있을지. 이 중 어떤 걸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은 아주 크게 달라질지도 모른다.

만약 30년 전으로 시간을 돌려 첫 번째 생일을 맞은 나를, 나 자신의 손으로 길러낼 수 있다면 나는 조금 달라질 수 있었을까. 내 부모가 했던 것과는 다를 수 있었을까.

내 부모님은 극성으로 나를 기르진 않았어도, 고집 세고 자존심 센 딸에게 단 한 번도 '무엇이 될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또 충분한 것 아니었을까. 그리고 먹고살기 바빠 늘 아등바등하면서도 충분한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나 역시 그런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것이 두려웠기에,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어른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에게서 몸도 마음도 독립을 한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원망할 곳이 필요할 때면 비겁하게도 그들을 소환해 탓하고 있었다.

이만하면 내 부모님은 나는 잘 길러왔고, 나는 잘 자라왔다. 이만하면 우리의 지난 시간은 제법 훌륭했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순간 온몸 여기저기에서 불편하게 결리던 콤플렉스의 덩어리들이 거짓말처럼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어쩌면 여태껏 그 누구의 손도 아닌 내 손에 의해 자라왔고, 또 만들어졌다. 나 자신의 손과 그리고 나 자신의 생각으로 말이다.

언젠가, 식물에게 욕을 하면 잘 자라지 않고 시들어가지만 매일 "사랑해"라는 말을 해주면 건강하게 자란다는 연구결과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고, 예쁜 말은 식물을 더욱 잘 자라게 한다는 걸.

서른한 살의 생일날. 더욱 심각한 기근이 오기 전, 가물었던 마음에 단비가 내려주어 다행이었다. 큰 선물이었다.


이제 부모의 몫은 끝났다. 0으로 돌아가기엔 어쩌면 조금 많이 늦었고, 어쩌면 오히려 이를지도 모를 나이. 아니 굳이 0으로 돌아가지 않고 31부터 다시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

앞으로 나는 내가, 예쁜 것만 보고 예쁜 생각만 하고 건강하게만 자라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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