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사랑은 천천히 자라난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항상 "엄마가 좋아요"였다. 거짓말이라도 "둘 다 좋아요"라고 말할 정도의 영악함이 없었던 나는, 어렸을 때에도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대답하곤 했다.
언제부터 엄마를 사랑하기 시작했는지 생각해본다면, 아마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세상에 나올 때부터 가슴엔 '엄마에 대한 사랑'이 장착되어 있었고, 그것은 절대적인 성질의 것이었다.
한 살씩 나이가 늘수록 때에 따라 그 사랑은 조금씩 다른 색깔을 띠기도 했는데, 그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건 바로 '동정'이라는 색깔이었다. 아빠보다 엄마를 더 사랑하게 된 이유도 어쩌면 엄마를 '더' 동정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해하고 아껴줘야 한다는 그런 마음. 어쩌면 의무감. 엄마는 약자였다.
이렇듯 엄마에 대한 사랑이 태어났을 때부터 무조건적이었던 거라면, 반면 아빠에 대한 사랑은 천천히 자라나기 시작했다.
어릴 땐 아빠가 미웠다. 매일 돈 때문에 투닥거리는 부모님의 모습이 싫었는데, 이유 없이 엄마 아닌 아빠만 미워했다. 사춘기 때는 아빠가 새벽에 우유배달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아빠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고, 스무 살이 되어 독립을 했을 때엔 조금씩 애틋한 감정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랬던 내가 진심으로 아빠를 사랑하게 된 건 아마, 아빠가 아프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여러 가지 병이 동시에 오는 바람에 아빠는 마음에까지 병이 들었고, 과연 다시 두 발로 걸어 병원을 나갈 수 있을까 두려웠던 그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처음으로 '지나온 아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대장암, 간경화, 뇌출혈, 당뇨 등. 아빠의 병은 아빠가 살아온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내 아빠가 시골 간판쟁이로 살아온 세월은 무려 30년이 넘는다.
늘 거뭇거뭇, 손때 벗겨질 날 없이 부지런히 일해왔고, 취미라 할 것도 한 번 가져보지 못한 우리 아빠. 일이 있든 없든 매일 아침 가게로 향했고, 여가를 보내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 늘 술과 담배로 시간을 보냈던 투박한 사람. 돈 얘기밖에 안 하는 아내와 엄마밖에 모르는 두 딸의 사이에서 참 많이 외로웠을 사람. 죽어라 일하고 이제 좀 살만해졌는데 이제는 몸이 망가져버린 불쌍한 사람.
그리고 나는, 서른이 넘어서야 아빠의 외로움이 어렴풋이 짐작되기 시작했다.
아빠의 인생은 내내 그렇게 흘러왔을 것이다.
예전에는 카페에서 종업원에게 반말로 이것저것 요구하는 아저씨를 보면서 꼰대라며 눈살을 찌푸렸던 내가 이제는 그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기차에서 혼자 앉아 주섬주섬 김밥을 먹는 중년 남성을 보고는 눈물을 터뜨린 적도 있다.
내가 사랑하고 동정했던 엄마처럼, 아빠도 그렇게 약자가 되어가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그런 아빠에게 다가가는 과정 중에 있는 걸까.
그럼에도 아빠를 향한 나의 사랑은 아직도 주춤거리고 있다. 아직 낫지 않은 마음의 병 때문에 가족을 힘들게 하는 아빠를 완벽하게 포용하지 못하는 못난 딸이다.
하지만 엄마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내거나 성질을 내는 아빠를 보면서는 "아빠가 아파서 그런 거야"라고 생각하고, 지나치게 연락을 해대며 내 업무에까지 지장을 주는 아빠를 대하면서는 "많이 허전해서 그런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아빠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살다 보면,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그때 그 시간'이 있다. 나는 언젠간, 아빠를 마음껏 사랑하지 못했던 지금을 떠올리며 펑펑 울게 될 것만 같다.
동정과 사랑 사이, 그곳에 엄마가 있다면
후회와 사랑 사이, 그곳에 아빠가 있다.
조금은 느리더라도.
충분히 사랑은 자라날 수 있도록,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마음속에 오래 묵혀뒀던 감정들을 글로 쏟아내는 걸 좋아해요.
흰쌀밥이 알알이 씹힐 때의 그 맛처럼 달콤하니, 최근에는 글 쓰는 게 참 맛있을 때가 많았는데요. 하지만 이 글을 쓰는 내내, 입 안에서 모래 섞인 밥이 버석거렸어요. 아빠와 관련된 글은 저한테 항상 그래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려서, 한참을 망설이고 미루다가 쓴 글입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조금 덜 사랑한다는' 고백을 털어놓았으니,
앞으로는 그리 아프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사랑은 더욱 자라나겠죠. @19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