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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희 May 29. 2019

아프지 않아도 마데카솔을 바르는 이유

그렇게 새 살이 솔솔 돋아난다

어린 시절의 나는 심한 '울보'였다. 놀이터에서 놀다 그네에서 떨어지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혼자 있다가 넘어졌을 땐 그냥 툭툭 털고 일어나지만, 누군가 달려와 “괜찮니?”라고 물어보기라도 하면 괜스레 서러워져 동네가 떠나갈 듯 울어버리곤 한다. 그렇게 한바탕 울고 나서 며칠이 지나면 상처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씻은 듯이 나아 있었다. 살갗이 까졌었다는 것도, 피가 났었다는 것도 잊은 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놀이터에서 뛰어놀았다. 울든 울지 않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아물 상처였다.

3년 전쯤, 술을 마시고 심하게 넘어져 다리를 다친 적이 있다. 고통보단 일단 쪽팔리는 마음이 더 커서 태연한 척 훌훌 털고 일어났는데,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다리를 만져보니 겨울용 스타킹이 찢어져 피가 흥건하게 묻어났다. 그 뒤로 상처가 아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아직도 다리에 보기 싫은 흉터가 남아있다. 울지 않고 용감하게 고통을 참아냈는데도, 상처는 남고 말았다.

어릴 땐 그렇게나 울보였던 나는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었고, 자라나는 동안에 내 몸과 맘에는 수백 개의 생채기가 생겼다가 또 아물었다가를 반복했다. 나는 상처에 제법 무던하고, 참을성 있는 유형의 사람으로 자라났다. 이렇듯 우리는 점점 상처에 무던해지는데,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운다고 해서 누군가 알아주지도, 상처의 크기가 작아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저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저마다의 무언의 이유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른이 된 나는 늘 그런 식으로 나의 아픔을 방관해왔다. 어릴 때 놀이터에서 놀다가 넘어졌을 때 그랬던 것처럼, “괜찮니?”라는 타인의 위로는 괜한 서러움을 더해 울음을 터뜨리게 하는, 긁어 부스럼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괜히 건드리지 않는다면 스스로 그럭저럭 참아낼 수 있는 아픔도, 누군가 들여다보기라도 한다면 이상하리만치 그 크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이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으니, 당연히 타인을 위로하는 방법 또한 몰랐다. 그래서 나에게 위로는 늘 숙제와도 같았다. "남자 친구랑 싸웠어! 정말 미워 죽겠어"라는 고민에는 "그럼 헤어져"라는 답을 내놓았고, "일하기 싫다ㅠㅠ"라는 투정에는 "그럼 그만둬"라고 냉정하게 말하기 일쑤였다. 당장 눈앞에 놓인 고민과 아픔조차 해결하지 못해 끙끙대는 일상 속,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고 그 마음을 어루만져 줄 여유 따윈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나의 직업은 방송작가였고, 그것은 늘 '상대의 아픔을 들여다봐야 하는 직업'이었다. 때로는 상대의 아픔에 공감해줄 줄도 알아야 하고, 때로는 상대의 아픔을 들쑤셔 더욱더 깊은 흉터를 남기기도 하는 직업. 하지만 나는 여전히 상대의 아픔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우회하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그 아픔의 깊이를 가늠하기 위해 쩔쩔매고 있다. 게다가 일을 한번 시작하면 제법 심취하는 타입이었으니, 타인의 아픔은 물론 내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도 최대한 방관하고, 마음을 쏟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럴수록 삶이 더욱 온전해진다고 믿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엔 상처가 생길 때면 어김없이 ‘마데카솔’을 발랐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상처가 난 곳에 연고를 바르면 세균의 감염을 막을 수 있고, ‘새 살이 솔솔~’돋아난다고 학습되어왔다. 연고를 바르는 그 행위는 어쩌면, 더 빨리 나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위안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몸에 상처가 생겼을 때에 흉 지는 걸 막기 위해 마데카솔을 바르는 것처럼, 마음이 다쳤을 때에도 저마다의 마데카솔을 발라줄 필요가 있다는 건, 아주 최근에 깨달았다.

일을 하면서, 또는 인간관계를 맺을 때 제법 자주 히스테릭하게 변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했는데, 해소되지 못한 상처들이 흘러넘쳐 타인에게까지 화살이 가는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

이렇듯 스스로의 상처를 단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어 곪아가고 있던 나는 최근, 상처에 대처하는 나만의 마데카솔을 찾았다. 그건 바로 내가 그간 그렇게나 기피했던, 일부러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이었다.

내 안에는 꽤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부모에 대한 콤플렉스와 가난이라는 과거의 아픔이 있었고, 프리랜서의 불안한 삶-이라는 현재의 아픔이 있었다. 줄곧 외면하기만 했던 문제들을 인정하고 또 글로 써보기로 했다. 묻어뒀던 상처들을 다시 꺼내 정면으로 바라봐야 하는 일, 나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하는 일은 생각만큼 너무도 괴로웠지만, 그렇게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펑펑 울고 나면 그 상처에서 한 발짝쯤은 벗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꺼내는 순간 더욱 상처가 될 줄로만 알았던 부스럼의 조각들. 하지만 신기하게도 ‘쓰는 순간’ 그 자리에는 새 살이 솔솔 돋아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처가 꽃이 되는 것도 아니고, 씻은 듯이 싹 사라져 없어져버리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어른이고, 한 번 생채기가 난 피부는 어릴 때처럼 쉽게 재생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연고를 발랐으니 조금은 괜찮을 거야. 어쩌면 새 살이 돋아날 거야.’라는 작은 위안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훗날 더 큰 흉터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뾰족한 모서리들이 살갗을 스치곤 하는 이곳에서, 자기만의 마데카솔 하나쯤은 품고 다니자. 생채기가 나면 언제든 꺼내어 바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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