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키운 흙수저 하나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어린 시절, 선생님이나 친구의 부모님 등 내가 만난 어른들은 대부분 내 아빠가 뭐 하는 사람인지를 인사처럼 물어보곤 했다. 어른들은 대체 그게 왜 그리도 궁금한 걸까. 나는 항상 의아해하곤 했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우리는 새 학기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했다. 부모님의 직업, 주거형태(자가, 전세, 월세)를 비롯해 자동차는 있는지, 텔레비전은 몇 대가 있는지 등등의 경제 수준을 파악하기 위한 세세한 정보들을 내 손으로 기록해야 했다. 나는 소도시의 시가지에 위치한 학교에 다녔기에 친구들의 부모님은 대부분 지역의 중소기업에 근무하시거나 상업에 종사했다. 그래서 크게 비교할 대상 없이 대부분의 아이들이 고만고만한 가정환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개중에는 눈에 띄게 '잘 사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버지가 병원을 운영한다거나, 대대로 교편을 잡는 집안의 아이들 정도가 모두에게 그렇게 인식되었다.
아버지 직업은 자영업. 엄마의 직업은 가사.
아빠는 쓰러져가는 광고사를 운영하며 '간판 일'을 하는 것이 직업이었고 엄마는 마트에서 일을 했지만 엄마는 가정환경조사서 부모님 직업란에 항상 그렇게 적도록 시켰다. 그렇게 우리의 가난을 뭉뚱그리길 바랐던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단어 하나가 나를 판단하는 '잣대'가 될 거라는 것을.
그렇게 종이 한 장으로 '잘 사는' 그들과 '못 사는'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유리 칸막이 하나가 놓이게 되었고, 나와 같은 칸에 있었던 아이들은 훗날 '흙수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불편할 뿐이다- 라는 말을 한 사람은 대체 얼마나 강인한 멘탈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나는 나의 가난을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릴 때는 사촌 형제들이 동전을 모아 문구점의 부루마불을 사는데 돈을 보태지 못하는 게 부끄러웠고, 친구들과 시내에 나갔을 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현수막을 다는 아빠가 나를 발견했을 때 모른 척 외면하고 싶었다. 그리고 엄마가 일하는 마트에는 절대 친구와 함께 가고 싶지 않았다. 실은 양복 입은 아빠를 가진 친구가 부러웠고, 하교 후 집에서 맛있는 간식을 해놓고 맞이해줄 엄마가 있는 친구가 부러웠다. 아주 어렸던 언젠가, 언니에게 "우리 집 가난해?"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러자 언니는 아니라며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실은 우리는 우리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후에도 그 사실을 묵인했다.
그리고 사춘기가 되면서부터는 의젓한 아이처럼 비추어지고 싶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척 연기를 했다. 가끔 일하는 엄마 아빠를 뜻하지 않게 마주쳤을 때마다 의연한 척 밝게 손을 흔들었지만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아야 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유리 칸막이가 생각보다 더 많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다.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가 뉘 집 자식인지, 집은 어느 동네의 몇 평 짜리 아파트인지를 궁금해했고, 나는 여전히 그것에 대한 보이지 않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그 선배가 알고 보니 대기업 아들이라더라"라든지, "쟤는 취미로 방송 하는 거래. 집이 그렇게 잘 산다잖아."라는 말들에 애써 무관심한 척했다.
하지만 이따금씩 치열한 삶에 치일 때에, 원망하고 탓할 구석이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나의 태생을 소환해 스스로를 더 큰 자괴감에 빠뜨리곤 했다. 어쩌면 나는 마음이 많이 가난했던 건 아닐까.
그랬던 내가 '가난한 흙수저'라는 빼박캔트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건, 비로소 그것을 인정하면서부터였다. 그렇다.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바빴고, 스스로 열심히 살지 않으면 중간 정도 가는 삶도 주어질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늘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다. 쉬지 않고 일했고, 나름대로 교양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제는 넉넉하진 않지만 꽤나 괜찮은 삶을 꾸려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나는 이제, 술자리에서는 "우리가 평생 부자가 될 확률은 없으니 소처럼 일해야지"라는 농담을 하기도 하고,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닌 이상 결혼은 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하며 가볍게 웃어 넘기기도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원룸에 살더라도 끼니를 거르지 않고, 지옥 같은 지하철을 타야 하지만 일하러 갈 직장이 있고, 퇴근길 손에 들린 맥주 네 캔에 마음이 풍족하고, 외제차를 타지 않아도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위로받는 삶. 누가 이런 삶을 나쁘다 말할 수 있을까.
최근 줄줄이 재벌 3세 마약 파문이 일었다. 뉴스를 보던 엄마가 끌끌 혀를 찼다. "돈이 차고 넘치니까 쓰다 쓰다 이젠 쓸 데가 없어서 별 지랄들을 다하는구먼"하고 고개를 저었다. 태어날 때부터 이른바 '금수저'라는 것을 물고 태어난 또 다른 세상의 그들은, 과연 내내 행복하기만 했을까.
어떤 숟가락은 밥과 국을 퍼담아 사람들의 배를 채우며 부지런히 제 역할을 하기도 하는 반면, 또 어떤 숟가락은 잘못 사용되어 흉기가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재질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
원래부터 당연하게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었던 사람과,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살면서 하나하나 늘려가는 사람. 그 행복감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아온 날들을 통틀어 현재가 가장 행복하다 말할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삶은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음에. 그것은 분명 흙수저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행복이리라.
나의 부모님은 돈으로 나를 풍족하게 지원해주지 못했지만 늘 남부럽지 않은 사랑을 주었고, 곧게 자라날 수 있게끔 교육했다. 나는 '가난'을 뿌리로써 제법 강인하게 자라났다. 때로는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사실이, 나를 가장 온전하게 살게 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열 금수저 부럽지 않은, 잘 키운 흙수저 하나가 되어가는 중이다.
세상의 모든 흙수저. 그리고 늘 마음에 미안함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온 그의 부모들. 우리는 모두 여태껏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서로를 마음껏 사랑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