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가희 Mar 28. 2020

평범한 내가 특별해지는 순간, 여행

라오스 여행 프롤로그


우리.. 갈까, 말까?


늦은 오후로 가득 찬 방비엥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라오스의 오후는 조금 흐리다. 눈앞이 흐리고 입과 코로 들어오는 공기조차 흐리다.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툭툭이, 흙먼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하굣길 자전거들, 작은 숯불 위에서 어마어마한 연기를 내며 구워지고 있는 바나나까지. 마치 새벽의 꿈처럼 약간은 비현실적인 그 공기 속에, 절대적으로 현실적인 각자의 삶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를 걸어, 우리는 ‘탐 짱 동굴’로 향하고 있었다. 여행 3일 차였고, 점점 그곳에 적응해 막 애정이 싹트려던 때였다. 조금 늦은 오전부터 하루를 시작해 카약킹을 하고 나서 점심을 먹었더니 오후 세 시 반이라는 애매한 시간이 되었던 터였다. 아쉬운 마음이 들어 물놀이를 좀 더 하자고 해서 나선 곳이 바로, 여행자 거리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탐 짱 동굴 입구의 계곡이었다.    


라오스는 물가가 워낙 저렴하고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 동남아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과거에는 젊은 서양인들에게 배낭 여행지의 성지로 통했다. 그런데 몇 년 전 국내 인기 예능프로그램에서 청춘 여행지로 소개되면서 한국의 20-30대가 가장 많이 찾는 여행지가 되기도 했다. 특히 방비엥이라는 시골 마을은 카르스트 지형의 이국적인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그 사이를 유유히 가로지르는 남송강과 산속 구석구석에 보석 같은 동굴과 라군들이 숨겨져 있어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바로 전날에 갔던 블루라군의 물빛은 정말이지 아름다웠지만 가히 그 명성답게도 사람들은 넘치듯 많았고, 나름대로 털털하다 자부하는 나로서도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살짝 실망을 했었다. 물론 그 분위기는 진짜 좋았다. (특히 즐겁게 놀고 있는 사람들 구경이 젤 재밌다)    


조금 더 깨끗하고 한적한 계곡을 찾아 나선 결과, 카약투어를 했던 여행사 직원에게 ‘탐 짱 동굴’ 계곡을 추천받았다. 탐 짱 동굴은 방송에서도 잠깐 소개된 적이 있었고, 인터넷을 통해서도 가는 길 정도는 충분히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은 채 우리는 희뿌연 공기를 뚫고 신나게 걸어갔다. 바나나 굽는 거리를 지나고, 거대 리조트를 짓고 있는 한적한 길도 지나고, 숲길도 지났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다리 하나가 나타났다.    


문제의 다리.


탐 짱 동굴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보행자 전용의 다리. 그 다리를 건너려면 한화로 왕복 700원 정도의 통행료를 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탐 짱 동굴의 입장 시간은 1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가겠냐고 물었다. 우리는 잠시 물러서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벌써 다리를 걸어 돌아오는 사람들이 더 많이 보였다.     


정확히 우리가 가려는 곳은 동굴이 아니라 동굴 앞에 있는 계곡이었다. 그 계곡은 이름도 없고 지도에도 뜨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 계곡이 탐 짱 동굴의 입장 시간과 관련이 있는지, 정확한 정보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정보는 그 계곡이 탐 짱 동굴의 게이트 안쪽에 있는 것이냐, 바깥쪽에 있는 것이냐 하는 거였다. 10분 후면 게이트는 닫히고, 그렇게 되면 헛걸음을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통행료까지 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아무리 검색해도 정확히 우리가 알아내고자 하는 정보를 알아낼 수가 없었고, 동행자와 나는 서로 계속해서 “어쩔래? 나는 상관없어.” 이 말만 하고 있었다.        



갈까 말까 고민될 땐 그냥 고!


잠깐의 망설임 끝에 우리는 결국 그냥 가보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해보기로 했다. 몇 분 동안 머뭇거리며 우유부단하게 굴던 게 무색할 정도로 “가자!” “그래” 하고 한순간 입장료를 턱 내는 모습이 쿨하기만 했다. 별것 아닌 결정 하나. 그것이 그 순간만큼은 우리를 용기 있는 여행자로 만들었다.     


다리를 건너 걸어가는데 점점 해가 넘어가고 있는 건지, 이 전의 물놀이로 아직 완벽하게 마르지 않은 옷이 더 축축해졌다. 날씨는 조금씩 쌀쌀해졌고, 숲길가로는 낮에는 열려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노점상들이 천막으로 꽁꽁 덮인 채 이미 하루를 끝낸 상태였다.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우린 이미 가기로 결정했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돌아가면 되니까. 조금은 과장된 발걸음으로 탐 짱 동굴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조금을 더 걸어 드디어 동굴 앞에 도착했다. 게이트는 예상대로 닫혀있었지만, 저쪽에서 깔깔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얼른 그 웃음소리를 따라가 보니, 마치 요정의 숲처럼 동굴 아래 감춰진 파랗고 동그란 물웅덩이 하나가 나타났다. 사실 웅덩이라고 하기엔 꽤 넓은 수영장 같았지만, 마치 누군가 만들어놓은 것처럼 동그란 그 모양새가 마치 웅덩이 같았다. 그 속에서 마구 웃어대며 물장구를 치는 동네 아이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시간은 이미 5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물이 차가워 제대로 된 물놀이를 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앞에서 자랑하듯 선보이는 동네 아이들의 다이빙도 구경하고, 우리처럼 느즈막히 계곡을 찾은 미국인 가족과 이야기도 나눠보면서 짧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시간은, 7박 9일의 여행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순간으로 손꼽힌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파르라히 저녁 어둠이 내려앉아 한층 더 꿈속 같아진 거리를 걸으며 얘기했다. 앞으로 이 여행에서만큼은 할지 말지 고민될 땐, 그냥 무조건 해보자고.        


동네 아이들의 핫플레이스, 탐 짱 동굴 계곡. 물이 맑아 바닥이 훤히 보이지만 발이 안 닿을 정도로 깊다.



검색이 아닌 경험에 의지할 때
여행은 더욱 특별해진다


나는 직업상 ‘정보’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다. 방송작가는 말 그대로 인터넷 검색으로 못 찾는 게 없다. 방송의 아이템을 찾고, 그에 적합한 출연자를 찾기도, 연예인의 연락처를 알아내기도 한다. 방송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팩트’이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또 확인하기도 한다. 10년 전에 뜬 인터뷰 기사 하나로 검색에 검색을 거듭해 그 사람의 연락처를 찾아낸 적도 있고, 아빠가 아팠을 땐 증상 하나로 예상 가능한 병들을 서치하고 정리해서 엄마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라니. 넘나 좋은 것 아닌가.    


이렇게 인터넷 검색을 맹신하는 나로서도, 여행 앞에선 어쩔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었다. 오키나와 여행에서 얼핏 과속카메라에 찍힌 것 같았는데 그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내지 못해 난감했던 적도 있고, 하롱베이에선 정보가 충분치 않아 유람선이 아닌 약간 허술한 통통배를 타고 섬에 들어가는 황당한 경험을 한 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상의 여행지 맛집, 별 다섯 개의 숙소들은 실제로 가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만큼 개인차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정의하기 힘든 것이 바로 ‘여행의 경험’이 아닐까 싶다.    


특히 라오스는 인터넷 정보에만 의존했다가는 크게 낭패 보기 쉬운 나라다. 청춘 여행지로 유명한 만큼 그에 맞는 액티비티 정보들이 넘쳐나고, 방송에 나온 관광지나 맛집, 또는 밤문화를 즐기기 좋은 바들에 대한 정보는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그 이외의 정보들은 다소 빈약하다.    


나는 가끔 내가 너무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는데, 특히 ‘내가 진짜 궁금한 것을 인터넷에 검색할 때’가 그렇다.    


[강서구 코로나 확진자 다녀간 곳], [기생충 OST], [몰아보기 좋은 드라마] 등의 뻔한 검색어부터, 나 말고 또 누가 검색해봤을까 싶을 정도인 [우울할 때 기분 좋아지는 법], [고양이랑 잘 놀다가 갑자기 물리는 꿈] 같은 검색어들까지. 모두 누군가가 내 맘을 읽었나 싶을 정도로 상세하게 포스팅을 해뒀거나 때로는 자동완성으로 뜨는 바람에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이렇듯 나는 모든 것을 검색으로 해결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걸 궁금해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세상엔 같은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 같은 고민과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걸 뜻하기도 하겠지.    


평범하다는 것은 어쩌면 다행이고, 어쩌면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부분 특별해지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종종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 바로 여행이다.     


여행은 인터넷 검색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개인의 경험’을 얻게 해 준다. 설사 그게 똑같은 경험이라도, 그 경험으로 인해 개개인이 완전히 같은 감정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래서 여행은, ‘나만이 할 수 있는 경험’ 그 자체고,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탐 짱 동굴로 향하는 길, 700원의 통행료 때문에 발길을 돌려 숙소로 향하지 않았기에 나는 특별해졌고, 정보 없이 그곳에 가본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특별해졌다. 그때가 아니면 안 될, 순간의 공기와 순간의 즐거움을 맛본 특별한 사람이 된 것이다.    


나의 여행은 늘 그랬으면 좋겠고, 이 라오스 여행기는 평범한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던, 그런 특별한 9일에 관한 이야기다.        





※ 이 여행기는 2019년 11월, 누구나 마음껏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가깝지만 먼 과거의 추억입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