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을 연주하는 법

형편없는 피아노 실력 앞에서 느낀 것

by 가희

여든다섯의 이순재 선생님은 여전히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삶을 사신다 하셨는데, 고작 서른이 조금 넘은 나는 무언가를 배우는 게 점점 두려워지고 있었다.

성인 지도를 전문으로 하는 피아노 학원에 다닌 지 보름 정도가 되었다. 어릴 때 배웠던 체르니는 마치 없었던 일처럼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고, 나는 악보를 보는 법부터 손가락을 사용하는 방법까지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배워야 하는 초보 중에 초보였다. 수업은 기초적인 피아노 지식과 아주 쉬운 레퍼토리 한 곡을 익혀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자유롭게 피아노를 칠 수 있도록 연습실이 제공되었는데, 그 연습실은 방음이 잘 되지 않는 작은 방 네 개로 꾸며져 있었다.

제법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지만, 매일 밤 9시마다 피아노를 치기 위해 학원으로 갔다. 아직 피아노가 익숙하지 않은 나는 한 곡을 막힘없이 치는 법이 없이 늘 더듬거렸다.



온 신경을 다해 건반을 누르고 있던 그때, 늘 옆방 또는 옆옆 방에서 엉켜 들어오는 다른 이들의 피아노 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마치 영화관에서 시끄러운 액션 신이 끝나고 조용한 장면으로 막 전환되었을 때 하필이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과 같았고,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열창하고 있는데 갑자기 노래가 끊기면서 내 쉰 목소리만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은 학원의 로비를 오가며 들은 다른 수강생들의 피아노 실력에 나는 적잖이 기가 죽었었다. 누가 들어도 화려한 재즈곡이나 내가 훗날 피아노를 잘 치게 되었을 때 멋지게 쳐 보이고 싶었던 뉴에이지 곡들을, 그들은 익숙하게 연주해내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정말이지 누가 들을까 무서운 실력의 소유자였다. 그때부터 다른 방에서 피아노 소리가 잦아들면 자연스럽게 나도 따라 연주를 멈췄고, 다시 소리가 들리면 따라 치면서 그들의 소리에 묻혀갔다. 누군가 허접한 내 소리를 듣고 비웃을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얼굴이 화락 달아오를 정도로 많이 부끄러워졌다. 초등학생보다 못한 피아노 실력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아까의 내 행동을 혹시라도 누가 눈치챘을까 봐 부끄러워졌던 거다.

'배우다'의 사전적 의미는, 새로운 지식이나 교양을 얻다. 새로운 기술을 익히다. 이것 아닌가. 배우기 위해 다니는 학원에서 실력이 안 된다고 부끄러워하고, 얼굴도 모르는 남의 눈을, 아니 남의 귀를 그렇게 신경 썼다니. 자신감 없었던 내 행동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대학 때 어느 소설가 선생님의 강의를 듣다가 "소설을 쓸 때 어떤 점이 가장 고민되는지 솔직하게 말해보라"는 질문을 받았다. 한 선배가 손을 번쩍 들더니, "저는 가끔 야한 내용을 쓰고 싶은데, 읽는 사람들이 제 경험담이라고 생각할까 봐 망설여져요. 부모님이 그걸 보면 뭐라고 할까요."라고 하는 거다. 교수님은 야한 내용을 쓰라고 해야 할지 쓰지 말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답을 내려줘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누가 보는 게 무섭다면 소설을 쓰지 말고 일기를 쓰지- 하고 생각하면서 그를 겁쟁이라 치부했다.

또, 어떤 예능프로그램을 제작하다가 지나치게 인성이 바른 한 아이돌 멤버를 만난 적이 있다. 데뷔한 지 10년이 넘은 중견 아이돌이라, 건방을 떨거나 까다롭게 굴진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힘든 촬영 스케줄에도 항상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며 스태프들까지 챙기는 그의 모습에 감동했더랬다. 하지만 촬영이 끝나고 편집을 하면서 카메라에 담긴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착한 것보다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멘트 한 번 하기 무섭게 불안한 눈빛으로 제작진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에 담겨 있었다. 결국 그의 불안한 시선들을 걷어내느라 편집에 적잖이 애를 먹었다. 그리고 그는 훗날 인터뷰에서도 고백했다. 그룹 내 다른 멤버들에 비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그는, 미움받는 것이 소름 끼치게 싫어 늘 피곤하게 살고 있다 했다. 잔인하지만, 실은 사람들은 너에게 큰 관심이 없는데 왜 그렇게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냐- 하고 생각했다.


자신감 없이 머뭇거리는 모습은, 가끔 보는 사람들을 짜증 나게 하기도 한다.



이렇듯, 누군가에게 내가 지금 자신감이 없다는 것,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은 없다.

나도 유키구라모토가 되는 꿈을 꾸기 이전에, 피아노를 아주 잘 연주할 수 있게 연습하는 이전에, 자신감을 잘 다룰 줄 아는 연주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조금은 뻔뻔해지고, 조금은 용기를 내어야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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