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박가희 Sep 21. 2020

더 늦기 전에, 여행!

라오스 여행 에필로그


슬프지 않았던 여행의 마지막 장


나는 종종 ‘마지막’을 기피하곤 한다. 정을 나누었던 사람과의 이별, 추억이 있는 장소에서의 이사 등, 좋아했던 무언가와의 마지막 순간은 항상 오랜 후유증을 남겼기에. 그 순간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얼렁뚱땅 넘기면서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같이 일을 하다가 프로젝트가 끝나면 팀원들이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데, 정이 많이 든 사람들일수록 마지막 인사는 제대로 하지 않았고, 여행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보면서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에 꺼버리거나, 좋았던 책의 마지막 장은 일부러 읽지 않고 남겨두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내심 다시 돌아올 것이 두렵기도 했고, 그곳에 있으면서도 여행의 순간이 좋으면 좋을수록, 서울로 돌아갈 내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비엔티안에서 방비엥으로, 루앙프라방으로, 또다시 비엔티안으로. 서울로. 9일의 짧았던 여행이 끝나고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고작 6시간 전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여행의 전과 후 나는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짧았던 손톱은 길었고, 라오스의 강한 햇살에 뒷목은 새까맣게 타 있었으며, 새것이었던 배낭 아랫부분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이렇게 조금은 변해버린 사소한 것들이 내가 그곳에 다녀왔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인천공항을 나서자 차디찬 아침 공기가 훅 하고 폐 속까지 들어찼다. 그 사이 서울엔 첫눈이 왔단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집은 차게 식어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일러를 틀고 따뜻한 물에 제법 오래 샤워를 하며 몸을 녹였다. 강한 수압으로 펑펑 쏟아지는 온수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데, 갑자기 그게 너무 감사하게 느껴지는 거다. 여행 내내 짐을 늘리지 않으려 30ml의 컨디셔너를 가지고 다니며 둘이 함께 나눠 썼는데, 손바닥에 컨디셔너를 양껏 짜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는데 시원하다 못해 쾌감까지 느껴졌다. 보일러를 켠 지 몇 분 되지 않았는데 금세 따뜻해진 방이 감사했고,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 아닌 옷장에 차곡차곡 쌓아둘 수 있는 삶이 감사했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에 정말이지 감사했다.

그리고는 짐도 풀기 전에 먼저 노트북부터 열어야 했는데, 그것 또한 감사했다. 여행 때문에 잠시 밀어두었던 일들을 처리하고, 바로 다음 날 새 프로그램 첫 출근을 앞두고 있었기에 단톡방을 개설해 본격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예고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노트북 바탕화면 메모장에 <내일 해야 할 일>을 정리해둔 후 깊은 잠에 빠졌다. 나는 생각보다 너무도 쉽게,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행의 마지막을 그리도 두려워하던 내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행에 후회 없이 충실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떤 여행은 새로운 경험인 동시에 다시 치열한 일상에 뛰어들 용기를 주고 내가 가진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이 여행은 해피엔딩이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 비엔티안 골목 풍경.
비엔티안 빠뚜싸이.



여행은 지금의 행복을 미루지 않는 것


라오스 여행을 가기 직전, 나는 6편짜리 시즌제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 이미 프로그램 시작 전부터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첫 미팅을 할 때부터 그 스케줄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 근무 일자를 협의한 채 일을 하기로 한 거였다. 부지런히 일해서 여행 가기 전에 모든 녹화와 일부분의 시사는 끝냈지만, 두어 편 정도의 후반 작업이 남아 있었다. 때문에 나는 여행 중에도 카톡으로 전송된 자막을 검수하거나 영상을 보고 피드백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오면 바로 새 프로그램에 투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같이 일했던 팀장 피디는 나보다 열댓 살 정도가 많았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여행을 가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을 시작으로 은근슬쩍 나를 훈계했었다. 흘려 들어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젊은 나이에 일이 많이 들어올 때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고작 에펠탑에서 찍은 사진 한 장 남기자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져버리면 안 된다고 했다.

물론 지금의 치열한 하루하루가 모여 훗날의 실버타운이  수는 있겠지만, 창문을 걸어 잠근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기한 일들을 모르는 척해가며 어른이 되기엔 너무도 아쉬우니까. 그렇게 경험 없는 어른이 되어 고급 실버타운에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그곳에 가더라도 또래 할머니들에게 들려줄 청춘의 여행기 하나 정돈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정신없이 일해온 20대는 순식간에 지나갔고, 30대가 되자 나는 종종 ‘그간 내가 뭘 하고 살아왔나’ 하는 생각에 후회가 되거나 괴로울 때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먼 곳으로, 긴 시간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는 거였다.

그리고 서른하나의 끝자락. 있는 시간 없는 시간을 쥐어짜서 9일의 여행을 다녀오고 보니, 이 쉬운 걸 그동안 왜 그리도 겁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행을 겁냈다기보다는 자리를 비우는 걸 겁냈던 것 같다. 내가 없으면 일이  돌아가고 세상이 무너질 수도 있을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러니 미련하게 일에만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새 프로그램의 개편과 함께 나는 다시 치열한 일상으로 돌아가 밤낮없이 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돌았다. 현재는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상황에 밤마다 여행병에 시달리곤 하지만, 그때의 여행을 미루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다며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지금’ 떠난다는 건, 지금 느낄 수 있는 행복을 훗날로 미루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어디든 떠나봐도 괜찮다.



마지막까지 아름다웠던 라오스의 노을. 신났으면 됐어!




※ 이 여행기는 2019년 11월, 누구나 마음껏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가깝지만 먼 과거의 추억입니다.

이전 11화 끈적한 라오스의 맛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라오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