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힌 건 바로 나였다
갑작스러운 실연으로 마음이 많이 다친 후,
이대로는 일도 손에 안 잡히겠다 싶어 계획 없이 제주도로 훌쩍 떠났던 적이 있다. 원래는 생각 정리도 좀 할 겸해서 혼자 여행을 할 예정이었지만, 우연히 일정이 겹친 한 지인과 만나 함께 다니기로 했다.
우리는 일을 하면서 만난 사이였고, 나이로는 그녀가 한 살 위였으나 연차로는 내가 선배인 그런, 호칭조차 애매한 관계이기도 했다. 그래도 제법 마음이 잘 맞고 취향도 비슷해서, 함께 하던 프로그램을 관두고 나서도 가끔 연락을 하고 만나서 술도 마시는 사이였다.
낯선 곳에서 만난 그녀는 제법 반가웠다. 어쩌면 나는 당시 '혼자'라는 것이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하염없이 걷기도 했고, 비 오는 아침부터 막걸리를 마신 것을 시작으로 종일을 술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참 많은 대화를 했는데, 주제는 단연 나의 이별에 대한 한탄이었다.
나는 평소 조금 뚝뚝하고, 그러면서도 무던한 성격의 소유자다. 예컨대, 손톱이 퍼렇게 멍들 정도로 문에 손이 꽉 끼여도 악 하는 소리 한번 내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고, 일할 때의 좌우명은 "짜증 낼 거면 그만두자. 그만둘 거 아니면 닥치고 하자"다. 엄살 부리고 짜증 낸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불평불만은 속으로만 이야기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연애를 할 때에 나는 달랐다. 평소의 애늙은이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미운 네 살'이 된다. 제발 나만 봐달라고, 나에게 모든 걸 달라고 징징대는, 정말이지 철없는 아이 같은 모습. 평소엔 여자 취급받는 것을 그토록 혐오하는 내가, 연애 앞에서는 항상 여자로 대접받고 싶어 했다. 평등한 연애는 용납할 수 없이, 이기적이게도 상대가 나를 더 좋아하길 바랐던 것 같다. 상대가 이런 나를 얼마나 견디고 받아주느냐가 사랑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좀 변태적인 성향임이 틀림없었다.
당시에 겪었던 이별의 원흉 또한, 아이 같은 내 모습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상대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고,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했다.
낮술을 마시면서 그녀에게 이런 얘기를 털어놓자, 그녀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연애를 하면 '개'가 된다고 했다.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고, 강아지처럼 낑낑대면서 상대에게 모든 것을 퍼붓는다는 거다. 연애를 할 때면 철저히 상대에게 모든 걸 맞춰주고 목을 매는 그런 스타일. 그래서 연애를 할 때엔 '나'는 없어지고, 상대가 모든 세계를 지배한다 했다.
그런 그녀도 언젠가 이별을 했고, 자신의 '세계'였던 상대방이 일상에서 빠져나가자 껍데기만 남은 기분이 들었었다 했다. 한참을 방황하던 그때 자기 발로 정신과를 찾아가기에 이르렀는데(지금 생각해도 정말 용기 있고 잘한 결정이다) 그때부터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정신과에서는 주로 잃어버린 나를 다시 되찾는 법,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알려줬단다. 가장 좋은 처방은 바로 '취미를 만드는 것'이었다. 남는 시간을 연애가 아닌 취미로 채우기. 그녀는 서핑을 하고 와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는 연애를 하지 않아도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자신을 찾기 위해 호주에 살고 있다.
상대는 사랑을 하며 애가 되어달라고도, 개가 되어달라고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롯이 자신의 선택이었다. 상처를 입힌 것도, 상처를 받은 것도, 어쩌면 자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주 잘못된 그런 선택.
돌이켜보니 정말이지 찌질한 사랑이었고 또 이별이었다.
감정의 밑바닥을 고백한 이후, 비 내리는 바다를 앞에 두고 두 찌질이는 쓴 술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