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한 발짝씩 부모와 이별한다

아빠와 나의 이야기

by 가희

내 나이 서른 살 때, 나는 아직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아이가 되어버린 아빠를 마주했다.

내 아빠는 내가 이십 대 중반 무렵에 대장암 수술을 했었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화장실에 가서 한참을 울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대장암은 초기에 발견됐고, 수술 날짜도 비교적 가깝게 잡혀 금방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으며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어느 날, 대장암 완치 판명을 앞두고 아빠는 피를 토하고 병원에 실려갔다. 이번에는 간경화라 했다. 간 이식까지 고려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꾸준한 관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아빠가 쓰러졌고, 또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데, 정확히 뭐 때문인지 원인이 불분명하다 했다. 아빠는 서울과 안동을 오가며 각종 검사를 받았다.

알고 보니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간경화 당시 있었던 과다 출혈, 그리고 지병이었던 당뇨까지 겹쳤고, 또 일을 하다 가벼운 뇌출혈도 있었었다 했다. 정밀검사를 해보니, '모야모야병'이라는 선천적 희귀병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흔히들 '백세시대'라는데, 예순도 되지 않은 아빠에게 그리고 나에게 왜 벌써 이런 일이 생겨야만 하는 걸까.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그때부터 아빠가 이상했다. 행동이 굼뜨고 눈에 초점도 없어졌고,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모님 곁에서 살고 있는 언니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급하게 안동으로 내려갔다. 병원에서 본 아빠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무뚝뚝하고 대쪽 같았던 아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아빠는 일곱 살 어린애가 되어 있었다.

뇌출혈 때문에 팔다리의 행동이 느려지고,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며 퍽하면 화를 내고 심지어 간호하던 엄마에게 의자를 집어던지기도 했다.

그건 '섬망'이라는 증상이었다. 치매와 다르지만 비슷한 것인데, 뇌손상이 있었거나 갑자기 병에 걸렸을 때 충격으로 오는 혼돈 같은 것이라 했다. 이게 지속될 경우에는 치매로 가기도 하는데, 주로 날짜나 시간을 헷갈려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아빠는 밤이 되면 우리를 괴롭혔다. 낮에는 주로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며 잠잠한 편이었지만, 밤이 되면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기 시작했다. 말리는 엄마와 나에게 화를 내며, 일하러 가는 사람을 왜 말리느냐고 했다. 아빠는 밤이 아침인 줄 알았고, 낮이 밤인 줄 알았다.

이 방법 저 방법을 동원해 막무가내인 아빠를 말리고, 엄마와 나는 교대로 쪽잠을 자며 아빠를 돌봤다. 누워있지 않으려 하는 아빠를 휠체어에 태우고 병원의 복도를 세 시간 동안 돌기도 하고,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나 빵을 주며 달래기도 했다. 정말이지 끔찍한 밤들이 계속됐다.

그러던 중 생각했다. 의식과 무의식의 가운데서, 아빠는 분명 있지도 않은 '일'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의 일생은 대체 어떻게 흘러왔던 걸까. 휠체어에 놓인 아빠의 투박한 손을 보며 잠시 몰래 눈물을 훔쳤다.


지옥 같은 날들이 지나고 마지막 뇌 검사 결과. 모야모야병도, 뇌출혈도 경미한 거였으니 생명에 지장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고, 앞으로 관리를 잘해주라는 말을 들었고, 그제야 아빠는 웃었다. 우리는 다음 날 퇴원을 했다. 그 날 후로, 느리지만 무사하게, 점점 아빠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20대의 나는 아빠의 대장암 소식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아빠의 부재'가 어쩌면 눈 앞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참 많이 아찔하고 두려웠던 것 같다.

하지만 30대의 나는, 그보다 더 심각한 상황임에도 그럭저럭 담담하기도 했다. 아빠의 증상에 맞는 병을 인터넷으로 서치 하고, 치료 방법과 비용 그리고 생존율까지 검색해봤다. 수중에 가진 돈이 얼마인지, 과수원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얼마의 인력이 필요한지 등등의 냉정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빠의 대리인으로 혼자 병원에 가서 아빠의 병명을 듣기도 했다. 혹여나 그것이, 드라마에서 보았던 "3개월 남았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라는 말일지라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물론 혼자일 땐 달랐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울었고, 친한 동료들에게 사정을 얘기하면서도 울었고, 잠을 자다 깨어나서도 울었고, 원고를 쓰면서도 울었다. 그래도 일을 했고, 그럭저럭 살아갔다.

구순이 가까운 외할머니가 시골에 혼자 살고 계시는데, 엄마는 종종 '할머니 돌아가시면..' 하고 덤덤하게 말하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바락 화를 내면서, 할머니가 왜 돌아가셔!! 아직 건강하신데!! 하고 말하기도 했다. 가끔 부모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는 자식들을 보며 고개를 젓기도 했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 담담한 누군가들을 보면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들은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빠는 여전히 매일 아침 자신의 손으로 인슐린 주사를 놓아야 하고, 그 좋아하던 술도 다신 못 마시고, 지능도 예전만큼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삶은 계속되고
우리 가족은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오래오래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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