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가 너무 아프다

엄마와 나의 이야기

by 가희

내가 기억하는 유년시절, 아빠와 엄마는 참 많이 다퉜었다.

단편적인 기억이지만, 엄마는 아빠를 참 미워했던 것 같다. 당시 우리 아파트는 기름보일러였는데, 아빠는 가끔 기름차 대신 말통으로 기름을 들고 와 보일러를 채워놓곤 했는데, 하룻밤도 채 못가 아침이면 추위에 떨어야 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 아빠의 싸움은 주로 이런 이유들이었다.

나는 아빠가 싫었다. 아빠는 폭력적이지도 않았고 여자가 있지도 않았고 나에게 뭔가 강요하는 꼰대의 성향이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외할머니에게 참 보기 드물게 잘하는 사위였다. 그래도 아빠가 싫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엄마를 고생시키는 아빠가 싫었다. 능력 없는 아빠가 싫었다.

반면 엄마는 마트에서 일을 하고 식당에서 일을 하고 심지어는 내가 다니는 학교의 급식실에서 일을 했다. 어느 날, 잘 만나지도 못하는 외삼촌이 나에게 물었다. 엄마가 급식실에서 일하는 게 부끄럽지 않으냐고.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진심이었다. 한 번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러나 단지, 엄마가 그것을 신경 쓸까 봐, 신경이 쓰였다.

시간이 흐르고 내가 대학교에 진학했을 무렵, 갑자기 아빠의 사업이 잘 풀리기 시작했다. 간판가게를 하는 아빠에게 온갖 지역 행사들의 현수막 의뢰가 들어왔고, (이것을 계기로 병을 얻었을진 모르지만) 아빠는 신나게 일을 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그리고 작은 아파트를 팔고 시골로 집을 지어 이사를 가자고 결정했을 때, 아빠가 많이 아팠다. 엄마는 낙담했다. 지나치리만큼 자신의 팔자를 비관했다.



그럼에도 나는 일을 했고, 한 번은 고향인 문경에서 촬영을 한 적이 있다. 집 근처의 한옥 게스트하우스에서 밤늦게까지 촬영했는데, 엄마가 구경하러 왔었다. 유난히 날씨가 추웠던 늦가을이었고, 유난히 촬영 상황이 어긋나며 내가 동분서주해야 했던 촬영이었다. 방송작가로 일한 지 9년 차였지만, 엄마가 내가 일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본 건 처음이었다. 한참을 그냥 지켜보기만 하던 엄마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집에 있는 옷이란 옷은 다 모아 왔고, 따뜻한 차를 스태프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훗날 엄마는 이 얘기를 하면서 울었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계모임에서 중국 리장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벌써 10년째, 그렇게 패키지로 여행을 다니고 있었는데, 아빠가 아프고 나서는 처음 가는 여행이었다. 최근 아빠의 증세가 많이 나아져서, 별 일이야 있겠나 싶었다.

여행에서 막 도착한 엄마는, 트럭에서 캐리어를 끌어내리며 "다신 안 간다" 하고 말했다. 엄마는 그날 밤 술을 많이 마셨다. 여행을 하는 내내 아빠는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였다 했다. 피곤하면 짜증을 내는 증세가 심해져서 남들에게까지 피해를 많이 줬다 했다. 엄마는 그것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여행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했다. 모두에게 동정을 받는 기분이었다 했다. 우리는 옛날에 많이 가난했고, 지금에서야 좀 살만해졌다 싶더니,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나, 세상이 참 가혹하다 했다.

그날 밤, 침대에 나란히 누운 우리 세 모녀는 서로를 끌어안고 많이도 울었다.

우리 가족에게,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와 나는 단 한 번도 서로에게 그렇다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누군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고, 또 어루만질 수 있는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괜스레 가슴을 움켜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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