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관절 수술 회복기 ⑥] 주차권 대신

주차권대신 운동화를 택한 이유

by 신은정

익숙한 풍경이 낯설게 다가올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실감해요.

수술 후 몸의 통증은 약으로 다스릴 수 있었지만, 예고 없이 찾아온 인지력의 저하와 우울은 어떤 처방전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깊은 안개였어요.

길을 잃은 날

분명 수없이 오가던 서현역이었어요.

6번 출구로 나가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낯선 5번 출구 앞에 멍하니 서 있었어요.

가야 할 건물은 보이지 않고, 주변 상점들은 마치 이사를 가버린 듯 생소했어요.

'나 정말 바보가 된 걸까?'

길 한복판에서 스스로가 너무나 초라해져 한참을 헤맸어요. 길을 잃은 것은 나의 발이 아니라 나의 정신이었다는 자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어요.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날

어느 날은 장을 보고 돌아왔는데, 평생을 누려온 내 집의 현관 비밀번호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어요.

손가락 끝에 머물던 기억이 증발해버린 자리에서 저는 속수무책이었어요.

결국 집 안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여보, 나 번호가 기억이 안 나..."라고 말하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어요.

내 집 문 앞에서도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그 서글픔은 수술 부위의 통증보다 더 아프게 가슴을 후벼팠어요.

장애인 등록을 권유받다

상태가 이렇다 보니 주변에서는 조심스럽게 장애인 등록을 권유했어요.

예전의 활기차던 제 모습을 아는 한 친구는 "정말 너답지 않다"며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고, 그 동정 어린 시선은 저를 자꾸만 좁고 어두운 방 안으로 밀어 넣었어요.

회복 중인 환자일 뿐인 제가 이미 '장애인'이라는 이름표로 규정지어지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이 무거웠어요.

남편의 한마디

그때 제 자존감의 밧줄을 단단히 붙잡아준 것은 남편의 한마디였어요.

"여보, 장애인 등록을 하면 주차도 편하고 혜택도 많겠지. 하지만 그 잠깐의 편안함을 택하기보다, 힘들어도 재활해서 다시 멋지게 걷는 인생을 택하는 게 낫지 않겠어? 당신은 충분히 해낼 수 있잖아."

그 말은 단순한 만류가 아니었어요. "당신은 반드시 다시 일어설 사람"이라는 굳건한 믿음의 선포였어요.

남편의 확신에 찬 눈빛을 마주하자, 비겁하게 숨기보다는 정면으로 시련에 부딪혀보고 싶은 오기가 생겼어요.

장애라는 이름표 뒤에 안주하기보다, 재활에 성공한 멋진 여자로 남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이 가슴 밑바닥에서 꿈틀거렸어요.

운동화 끈을 동여매다

저는 그날로 장애인 주차권이라는 유혹을 기꺼이 내려놓았어요.

대신 신발장에서 푹신한 운동화 한 켤레를 꺼냈어요.

느슨해진 운동화 끈을 단단히 동여매는 순간, 느슨해졌던 내 삶의 의지도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결심은 곧 실천이 됐어요.

수술한 다리로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누르고 스포츠센터를 찾았어요. 수영과 헬스를 등록하고, 물속에서 서툰 발차기를 시작했어요.

헬스장의 기구들을 하나하나 익히며, 저는 제 몸과 다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어요.

핸드폰 메모장 활용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깜빡거리는 기억력을 붙잡기 위해 핸드폰 메모장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어요.

매일 아침 그날의 운동 목표를 적었어요. "오늘은 수영장 3바퀴", "헬스장 레그프레스 10회". 그리고 약속 시간, 가야 할 장소, 해야 할 일들도 하나하나 기록했어요.

메모장에는 스스로를 향한 응원도 적어 내려갔어요.

"오늘도 잘했어. 5분 더 걸었잖아."

"비밀번호 까먹어도 괜찮아. 다음엔 메모해두면 돼."

핸드폰 메모장에 적힌 할 일들을 하나씩 지워갈 때마다, 잃어버렸던 일상의 주도권이 조금씩 제 손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어요.

늘 손에 들고 다니는 핸드폰이라 수첩보다 훨씬 편했어요. 언제 어디서든 기억해야 할 것이 생기면 바로 메모했어요.

당신에게

큰 수술 후, 절뚝거리는 다리와 깜빡거리는 기억 때문에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지는 그 막막함을 저는 잘 알아요.

서현역 한복판에서 헤매던 저처럼, 집 비밀번호 앞에서 작아졌던 저처럼요.

하지만 누군가 저에게 그랬듯, 저도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잠깐의 편안함에 당신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두지 마세요.

지금 조금 휘청인다고 해서 당신의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건 아니에요.

주차권 대신 운동화를 택해보는 건 어떨까요?

오늘부터 핸드폰 메모장을 열고, 내 몸을 위한 작은 움직임을 시작해 보세요.

잊지 않으려 애쓰고, 한 걸음이라도 더 제대로 내딛으려 노력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당신이 다시 건강해질 자격이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예요.

우리는 지금 고장 난 게 아니라, 아주 천천히 다시 맞춰지는 중이에요.

운동화 끈을 다시 꽉 조여 매는 순간, 당신의 진짜 회복은 이미 시작된 거예요.

저처럼요.

우리, 함께 해내요.

다음 글 예고

⑦ 재활 운동의 시작: 종아리에 새겨진 승리의 기록

독자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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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장애 등록을 고려하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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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소식

이 글은 곧 출간될 전자책 <사라진 72시간,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의 일부입니다.

부제: 119 앰뷸런스에서 내 발로 걸어나오기까지

전자책에서는 더 구체적인 재활 운동법, 인지력 회복 과정, 심리적 극복 이야기 등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저처럼요.

우리, 함께 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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