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지도 못한 남편의 편지

여성의 말

by 신은정

어제 남편이 편지를 읽었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책을 내고, 칼럼 기자가 된 나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A4 한 장 가득 써온 글이었다.

감동적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읽는 내내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구경하는 것 같았다. 내 이야기인데 내가 주인공 같지 않은 느낌.

나쁜 마음인가 싶었다. 그런데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오래 누군가의 이름으로 살아온 사람이 이제 막 자기 자신한테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으니까.

그 편지가 이 글을 쓰게 했다.

새벽 6시다.

시댁 식구들은 새벽 4시까지 포커를 치다 잠들었다고 했다. 나는 온몸이 아파 수면제 한 알을 먹고 겨우 잠들었다가 일어나 글을 쓴다.

난 시댁식구들과 있으면 작은 에너지가 생긴다.

내몸이 기억하는 학습된 큰며느리는 책임가민듯.

여기까지 오는 길이 순탄하지 않았다.

이혼을 여러 번 꿈꿨다. 실제로 아이를 데리고 나온 적도 있었다. 방도 없는 옷가게를 차려 거기서 살았다. 딸은 친정에 맡겨두고, 방을 얻은 뒤에야 데려왔다. 남편이 몇 달 후 따라나와 버스를 세 번 갈아타며 출퇴근하던 시절도 있었다.

자존감을 바닥까지 치게 만드는 말들도 있었다. 욕이 섞인 말들.

안 보고 산 세월도 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시어머니는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시누이가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엄마, 새언니한테 할 말 있으면 하라고.

그 자리에서 시어머니는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서 말씀하셨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세 번이었다.

그 말을 들은 이후, 시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사라졌다. 노력해서 용서한 게 아니었다. 그냥 녹아버렸다. 세 마디가 오래 쌓인 것들을 조용히 풀어냈다.


돌아보면 나는 오랫동안 삼키며 살았다.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늘 누군가의 이름으로 불리며 정작 내 이름으로 말할 기회가 없었던 시간들.

부당해도 울기만 하고, 세상이 원하는 잣대에 맞추어 살아온 날들.

그 결과로 인정은 받았다. 하지만 내 삶은 건강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젊은 여성들에게 나처럼 살기를 권하고 싶지 않다.

참는 것이 반드시 덕이 되지는 않는다.

인정받을 수는 있어도,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일은 아닐 수 있으니까.


환갑이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늦었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도 그랬다. 이제 와서 무슨 글이냐고.

그런데 써보니 알겠다. 늦은 게 아니었다. 60년을 살아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 있었다.


삼켜온 말들이 글이 되었다. 울기만 하던 자리에서 쓰는 자리로 옮겨왔다.

감정적이라는 말로 지워지던 것들이 문장으로 남기 시작했다.


어제 남편의 편지를 받았고, 오늘 시어머니의 미안하다 세 마디가 떠올랐다.

두 사람의 말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리고 나는 그 말들을 받아 안고, 오늘도 쓴다.


삼켜온 말이 있다면, 꺼내도 된다.

감정이 있다면, 신뢰해도 된다.

늦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이 그때다.

잘하고 있다. 정말로, 잘하고 있다라고

힘들게 살아가고있는 여성들에게

나에게도 토닥토닥해 주고싶은 하루이다.







태그

#여성의말 #그래도나는쓴다 #남편의편지 #삼켜온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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