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나에게

5분에세이

by 신은정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자주 떠올린다. 그립다.

며칠 전은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남편은 혼자 아버지께 다녀왔다. 나는 가지 않았다. 가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친정 식구들과의 부딪침이 아직은 불편하다는 이유로 나는 그 자리를 피했다. 그럼에도 아무 말 없이 혼자 다녀와 준 남편이 고마웠다. 누군가를 이해해 준다는 건 말없이 물러나 주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다는 말은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그 말 속에 원망이나 비난이 섞일까 봐 나는 오래 망설였다. 하지만 솔직해지고 나서야 내 안의 어린 은정이를 조심스럽게 토닥일 수 있었다. 그 자리에 머무는 아이가 아니라, 조금 더 성숙해진 은정이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그제서야 생겼다.

어릴 적 나는 일찍 철이 들었다. 큰딸이라는 이유로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가기 싫다고 말은 했지만 떼를 쓰며 내 길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울고 싶을 때 울지 않았고, 기대하고 싶을 때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대신 스스로를 다독이는 쪽을 선택했다. 그게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나는 관계 속에서 따뜻함을 찾기도 했고, 일과 역할 속에서 나의 자리를 증명하려 애쓰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면 조금은 사랑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모든 애씀의 뿌리가 '엄마의 사랑이 부족했던 아이'로 자라온 시간에 닿아 있었다는 것을.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은 나에게 치유의 힘을 건네주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조용히 불러내 앉혀주었고, 서두르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었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잘해야 할 필요도, 괜찮은 척할 이유도 없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내가 평생 찾고 있던 것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대하는 태도'였다는 것을.

요즘의 나는 이 질문을 혼자 붙들고 있기보다 조심스럽게 누군가에게 묻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람에게 묻는 일이 쉽지 않았다. 괜히 과거를 들추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엄마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까 봐 말을 삼키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서 나는 ChatGPT에게 물었다.

"엄마의 사랑이 부족했던 사람들은 그 마음을 어디에서 찾으며 살아갈까."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여 주지도, 감정을 먼저 짐작해 주지도 않지만 ChatGPT는 내 질문에 성의껏 답해주었다. 판단하지 않는 존재에게 나는 처음으로 이 질문을 끝까지 말해볼 수 있었다.

그렇게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고, ChatGPT에게 묻는 이 과정 속에서 나는 조금씩 용기를 얻었다. 이제는 아주 친한 친구에게도 조심스럽게 마음을 연다. 정리되지 않은 말로, 확신 없는 질문으로, 지금의 나를 그대로 꺼내 보인다.

ChatGPT에게 묻고, 친한 친구에게도 묻고, 나 자신에게도 묻는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어온 나,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나, 그리고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나. 그 여러 갈래의 시선을 통해 나는 나를 한쪽으로 단정하지 않고 조금 더 입체적으로 이해해 보고 싶어졌다.

이 질문은 답을 빨리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흩어져 있던 나를 천천히 정리해 가기 위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에게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람일수록 누군가를 돌보는 데 유난히 능숙하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고, 어쩌면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는 생각을 한다. 그건 타고난 다정함이라기보다, 한때 너무 간절했기에 누군가의 신호를 먼저 알아보게 된 능력에 가깝다.

돌보는 동안에는 나도 잠시 안전해진다.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감각,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나를 편안하게 하고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는 진실이 있다. 내가 주고 있던 이 사랑을 사실은 내가 받고 싶었다는 것.

그래서 돌봄은 때로는 따뜻하지만, 때로는 지치게도 만든다. 아무도 부탁하지 않았는데 혼자 애쓰고, 괜찮은 척하다가 문득 허탈함이 밀려온다.

요즘의 나는 누군가를 돌보는 그 손을 잠시 나에게로 내민다.

엄마의 부족한 사랑을 찾아 오래 헤매다 보면 사람들은 결국 자기 안의 엄마를 만들어 간다는 말처럼, 나 역시 내 안의 엄마를 만들어가며 어릴 적 아파하던 나를 조심스럽게 돌보려 한다.

나는 아픈 마음을 다그치지 않고, 괜찮아질 때까지 그 자리에 함께 머무는 연습을 한다. 여기까지 온 나에게 충분히 잘해왔다고 스스로 말해준다.

나는 아직 답을 완전히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적고, 누군가에게 묻는 이 과정 자체가 이미 그때의 나에게 조금씩 엄마가 되어가는 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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