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글을 붙잡다가

by 신은정


필사를 너무 오래 한 탓일까.

나는 침대 위에 엎드려 필사를 자주 한다.

좋지 않은 자세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도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글을 베껴 쓰는 시간이 좋다. 무언가 일을 한다기보다 쉬는 느낌에 가깝다. 그래서 피곤한 줄 모르고 오래 하게 된다.

일요일 오후 네 시쯤이었다.

오른쪽 목과 쇄골 위쪽, 흉골 근처가 살짝 부어 있는 것 같았다.

딸아이는 친구가 공연하는 Anna Karenina을 보러 Sejong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에 갔다. 남자친구와 보라고 친구 엄마에게 부탁해 VIP석을 40% 할인받아 선물한 자리였다.

남편도 스크린 약속이 있다며 나갔다.

나는 센터에 가서 목욕을 하며 몸을 풀거나 마사지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 지하 1층에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순간 이상했다.

‘쉬는 날인가?’

센터 쪽을 바라보니 불이 꺼져 있었다. 맞다. 쉬는 날이다. 한 달에 한 번 쉬는데 하필 오늘이 그날이었다.

마사지 원장님께 전화를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지만 역시 자리가 없었다. 다음 주 예약만 해 두고 전화를 끊었다.

집으로 돌아가려다 야탑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 정이네 집에 모여 있다며 오라고 한다. 차를 야탑으로 돌렸다.

주차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있어 학교 앞에 차를 세우고, 우리 집과 같은 호수인 202호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자마자 복희 언니는 요리를 하느라 분주했다.

요리에 나름 철학이 있는 언니다. 시어머니가 전라도 분이라 신선한 재료 맛을 살리고 양념은 최소한으로 줄여 요리를 한다.

옆에서 도와주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생채무침, 파무침, 생선조림이 금세 완성됐다.

정아네 김치와 파김치, 무우장아찌도 식탁에 올라왔다.

무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놀랄 만큼 맛있는 장아찌였다.

‘나나스끼’라는 장아찌와 비슷한 맛이 난다. 정아표 무우장아찌는 꼭 배워보고 싶은 맛이다. 내년 겨울에는 나도 한번 담가보고 싶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누군가 화투판을 꺼내왔다.

돈통에는 천 원짜리 지폐가 거의 신권으로 오만 원 정도 들어 있었다. 만 원 정도 판돈으로 나누었다.

“한 시간만 하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화투를 쳤다.

짝을 잘못 맞추는 언니가 피박에 흔들어 이천 원씩 거두어 들인다. 삼백 원, 육백 원씩 받는 것보다 훨씬 낫다며 웃는다.

나는 고스톱을 고향 친구나 친정엄마, 시어머니와 놀이 삼아 몇 번 쳐 본 것이 전부다.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런 내가 제법 잘하는 축에 든다.

놀고 나면 판돈은 다시 돈통으로 고스란히 돌아간다.

이렇게 노는 것도 재미있다.

그날 밤이었다.

집에 돌아온 뒤 나는 응급실에 가야 하나 싶을 만큼 아팠다. 친구 집에서 파스 하나 붙이고 화투 한 시간 친 것이 전부인데도 말이다.

여덟 시쯤 집에 오자마자 근육이완제를 먹었다. 자기 전에는 타이레놀을 두 알 먹었다.

아파서 눈을 뜨니 새벽이었다. 아직 약을 먹을 시간이 되지 않아 버티는데 너무 괴로웠다. 응급실을 가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다.

아프면 서럽다.

모두 잠들어 있는 시간, 혼자서 고통과 싸우고 있었다.

다음 날 병원에 가서 주사와 도수치료를 받고 나오니 조금 살 것 같았다. 하지만 당분간 필사도, 머리를 오래 숙이는 자세도 금물이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생각했다.

나는 요즘 LongBlack의 글을 자주 필사한다.

하루가 지나면 사라지는 글이라 괜히 붙잡아 두고 싶어서였다.

그날은 여섯 시간을 엎드려 글을 베껴 쓰고 있었다.

사라지는 글을 붙잡으려다

내 목이 먼저 놀란 셈이다.

그래도 아마 나는 다시 필사를 할 것이다.

다만 다음번에는

조금 덜 숙이고,

조금 덜 오래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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