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결 (사는 이야기)
삼방산 아래, 안덕에 있는 화순 금모래해수욕장. 해변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맨발로 모래를 밟으며 걷는 사람들이었다. 신발을 벗어 손에 든 채, 발목까지 모래에 묻히며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들. 파도가 밀려왔다 물러갈 때마다 발자국이 지워지고, 또 새로운 발자국이 찍혔다.
나는 신발을 신은 채 한참을 걸었다. 모래가 신발 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불편했지만, 벗기엔 뭔가 번거로울 것 같았다. 걷다 보니 문득 '내일은 손수건이라도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을 씻고 닦을 수 있게.
모래사장을 걷고 있는 한 분께 물었다.
"물이 차지 않아요?"
그분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따뜻해요. 걸어보세요. 정말 좋아요."
오십대 중반쯤 보이는 여성이었다. 운동화를 벗어 한 손에 들고, 바지를 종아리까지 걷어올린 채였다. 그분은 이어서 말했다.
"우리 부부는 모래사장을 걷기 위해 제주에 한 달 살기로 왔어요."
남편과 함께 왔지만 각자 시간을 즐긴다고 했다. 남편은 오름 산책을 좋아하고, 자신은 해변을 좋아한다고. 모래 위를 45분쯤 걸으면 몸이 한결 가벼워진다고도 했다. 발바닥의 지압 효과 때문인지, 아니면 파도 소리가 주는 평온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기분이 좋아진다고.
그분과 헤어져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바다는 잔잔했다. 수평선 너머로 형제섬이 희미하게 보였고, 멀리서 카약을 타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물 위에 떠 있었다. 햇살이 수면에 부서져 반짝였다. 파도는 규칙적으로 밀려왔다가 물러갔다. 쏴아— 하는 소리가 귀를 씻어주는 것 같았다.
한참 걷다 보니 몸이 조금 불편해 보이는 분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가 있어 보였지만 표정은 따뜻했다. 내눈엔 칠십쯤 되어보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등이 약간 굽었지만 걸음은 꾸준했다.
어느새 셋이서 나란히 걷게 되었고, 그분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교회 다니는 신자인데요, 너무 답답해서 절에 가봤어요. 시주를 3만 원 했는데, 아무 말도 안 해주시더라고요."
그분이 씁쓸하게 웃었다.
"차라리 그 3만 원을 당신한테 줄걸."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그 말 뒤에는 마음의 상처가 느껴졌다.
딸아이에게 서운한 일이 있었던 듯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몇 마디 사이사이로 그리움과 서운함이 묻어났다.
그분은 간암 투병 중이고, 약간의 치매 증세도 있으며, 교통사고를 네 번이나 겪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표정은 밝았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음에 감사해요."
하며 미소 지었다. 주름진 얼굴에 번진 미소가 진심으로 느껴졌다.
그분이 차 한잔 사주고 싶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변을 벗어나 해안도로를 따라 걸었다. 바람이 불었다. 그분의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분이 내 팔짱을 살짝 끼셨다. 조심스럽게, 마치 허락을 구하듯이.
외로움이 느껴졌고,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팔에 힘을 주어 그분을 받쳐드렸다. 이야기를 들어드리며 나도 모르게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그저 곁에 있어준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걸 깨달았다.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분은 따뜻한 유자차를 주문했고, 나는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유리잔에 담긴 노란 유자가 예뻤다. 그분은 천천히 차를 마시며 계속 이야기했다. 젊었을 때 이야기, 아이들 키우던 시절 이야기, 남편 이야기. 말을 하는 동안 그분의 눈빛이 조금씩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때 친구 정임이에게 문자가 왔다.
"어디야?"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때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커피숍인데 10분 있다 갈게"라는 문자를 남기고 일어섰다.
그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택시 타고 금모래해수욕장으로 가요. 어두워져서 걷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카카오택시를 부를까 하다가 문득 물었다.
"농협마트가 어디쯤이에요?"
그곳까지만 가면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 정임이랑 농협마트를 갔다가 걸어갔던 길, 기억해내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분과 함께 농협마트까지 걸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조금 더 차가워졌다. 그분은 여전히 내 팔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농협마트 앞에서 그분과 헤어졌다. 그분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좋은 시간이었어요."
나도 말했다.
"저도 좋았어요. 건강하세요."
그분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낯선 사람과의 대화가 글감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내가 낯선 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음에 놀란다. 요즘 내 마음이 조금 더 열려 있는 걸까?
그것보다, 아픔을 털어놓는 분에게 작게나마 힘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오히려 나 자신이 치유되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일이 결국 나를 위로하는 일이 된다는 것.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가 길을 잘 찾아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낯익은 건물이 보이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어제 지나쳤던 일광횟집을 지나서 좌회전을 하고 쭉 따라가니 익숙한 길이 반겨주었다. 길을 안다는 것, 방향을 찾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정임아, 나 이제 지역 주민 다 됐네. 잘 찾아왔지?"
함께 돼지고기 수육에 고치를 쫑쫑썰어서 만든 짜글이와 함께 솜씨좋은 친구의 김치로 맛있는 식사를 했다. . 하루 종일 걸어서인지 온몸이 나른했다.
아침에 정가주 작가님이 말했던 '창조적 영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래, 나는 오늘 창조적인 영양분을 가득 채운 하루를 보냈다.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바다의 풍경, 모래밭을 걷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나를 채워주었다.
창밖으로 제주의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별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일은 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기대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