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닥에 물집이 잡혀도 17000보를 걸은 날의 기쁨

일상의 결 (사는 이야기)

by 신은정

살다 보면 커다란 문제 앞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걱정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정작 소중한 일상은 돌보지 못한 채 흘려보내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고민과 고통은 떨쳐내는 것이 아니라, 늘 내 안에서 함께 숨 쉬는 존재라는 것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제는 큰 문제 앞에서도 꿋꿋이 오늘을 산다. 매일 반복하는 작은 행동 하나, 나만의 루틴이 나를 단단하게 지켜준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야간 일을 마치고 퇴근할 남편을 위해 미리 도시락을 준비해 두었다. 벨 소리에 잠시 일기 쓰기를 미룬 채 밥상을 차렸다. 다시 일을 시작한 덕분인지 남편의 얼굴에는 기분 좋은 여유와 활기가 감돌았다. 취업 후 제일 먼저 흑염소를 주문해 주었다는 남편의 마음, 그리고 정성껏 김치를 담가 보내주신 형님의 다정함이 데워진 흑염소 한 잔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어제는 오랜만에 역사 공부 모임에 다녀왔다. 기대했던 10월 안동 답사가 인원 부족으로 취소되었다는 소식에 다들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새로 바뀐 강의실의 책상은 또 어찌나 불편한지. 음료수 하나 올려둘 곳 없는 새 가구를 보며 우리는 함께 예전의 낡은 책상을 그리워했다. ‘느끼는 건 다 비슷하구나’ 싶은 생각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좋아하던 육회비빔밥이 비싸진 가격 탓에 메뉴에서 사라졌다는 서운함도 잠시, 함께 나누어 먹은 돌솥비빔밥과 만두의 온기 덕분에 그 시간은 충분히 따뜻했다. 삼원가든 정원의 물레방아와 그 틈에 숨겨진 지도 같은 소소한 풍경들을 눈에 담으며 일상의 여유를 만끽했다.

소영 언니네 집에 차를 두었기에 탄천을 따라 걸었다. 예쁜 패션 운동화를 신고 나선 탓에 발등엔 물집이 잡히고 말았다. 17,000보라는 숫자가 무색하게 통증이 밀려왔을 때, 언니가 선뜻 자신의 양말을 벗어 건네주었다. 신발을 벗어 던지고 양말만 신은 채 걷는 길. 발바닥은 여전히 아릿했지만, 그 길을 함께 걸어주는 따뜻한 마음이 고마워 자꾸만 웃음이 났다. 걷는 것 자체가 감사한 하루였다.

삶은 여전히 쉽지 않고 답을 모르는 문제들은 늘 곁에 머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매일의 작은 루틴 속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간다. 따뜻한 밥상, 정겨운 대화, 그리고 조금 아프더라도 함께 걷는 이 길들이 모여 결국 나를 지켜준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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