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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Nov 07. 2022

존 윌리암스의 소설 '스토너'










보통 사람  '스토너' 


독서 내 공가들이 인생 소설로 극찬한 존 윌리암스의 '스토너'를 밀리의 서재 전자책으로 오늘 완독 했다.  익숙한 방식에 더 길들여졌기에 가독성이 종이책보다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이 책을 통해 앞으로는 전자책 활용이 높아질 것 같다. 


극찬받은 영화, 책, 음악을 접할 땐 내 감동이 평단의 기준점을  따라가지 못하면 괜한 자괴감이 든다.  나에겐 왜 그저 밋밋하게 다가오지.  벅찬 감동을 준다는데 어느 부분이 그렇다는 거지?  리뷰를 읽으며 복기하듯 작품을 재감상 하며 놓친 감동 포인트를 학습할 때도 있다.  


존 윌리암스의 소설 '스토너'의 주인공 이름은 윌리엄 스토너이다.  평양냉면을 처음 먹어 본 사람이 그 슴슴한 맛에 금세 빠져들지 못하는 것처럼,  스토너 역시 첫인상이 평범한 무색무취라 캐릭터 몰입이 쉽지 않다.  많은 작품 속 주인공은 처음엔 뭔가 2% 부족한 듯해도 포레스트 검프처럼 나중에 한방이 꼭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토너는 1956년  6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삶의 변방에서 야비한 권력에 늘 당하기만 하는 만년 피해자의 삶만 살아낸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중략)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노장 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고,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 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존 윌리암스의 '스토너' p 6~ 7 






소설 첫 장에서처럼 주인공 스토너는 특별한 임팩트가 없는 사람이다.  스토너의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면 독자는 그의 삶이 실패에 더 가깝다란 생각까지 들 거다.  학자로서 명성을 떨치지 못했고, 교육자로서 학생들의 인정을 받지도 못했으며 사랑에 성공하지도 못했고,  가정에서 단 한 번도 안식을 찾지 못했다.   선하고 참을성 많고 성실한 성격이었지만 현명하다고 하기는 힘들었고,  불굴의 용기와 지혜로 난관을 극복하기보다는 조용히 인내하며 기다리는 편이었다. 



작품 창작을 할 때 캐릭터가 매력 있으면 독자나 관객의 몰입도 빠르고 작가도 글을 풀어나가기 쉬울 거다. 스토너란 캐릭터는  불합리한 상황이나 처우가 닥쳐도 견디는데 특화된 사람이다.  이동진 평론가가 스토너를 읽고 쓴 짧은 감상 편에 스토너를 제대로 소개하고 있다.






내게 윌리엄 스토너는 실존했던 사람 같다. 그의 약력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존 윌리암스의 스토너를 닮은 검약하고 고요하면서 술수를 부리지 않는 문장이 그렇게 만들었다.  <스토너>는 삶의 가치가 삶 자체일 수는 없다고 말하는 소설이다.  가치가 훼손되고 목적이 좌절되며 소망까지 상실되어도,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한 사람의 세월이 꼬박꼬박 흘러간다.  미련하지만 끝내 위엄을 잃지 않은 인간에 대한 성실하고도 위대한 문학이다


이동진 (영화평론가)










미련하지만 끝내 위엄을 잃지 않은 인간 


주인공을 빛내주는데 악당은 꼭 필요하다.  그들이 주는 시련이 비열할수록 독자는 주인공을 응원하게 되고, 고난을 극복하면서 주인공이 성장해나가는 모습은 작품의 주제가 될 수도 있다.  '스토너'에서 주인공 스토너에게 시련을 주는 인물 부인 이디스, 동료 교수 로맥스, 대학원생 찰스 워커는 악의 축이면서 심리치료가 필요한 폭력적이고 굴절된 인성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이 스토너에게 자행하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은 광기에 가깝다. 그럼에도 스토너는 계속 참아내기만 하고 악당들은 더욱 사악하고 간교하게  스토너의 삶을 극단으로 몰고 간다.  그들에게 회개란 없고, 오로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만 있다. 이쯤 되면 소설을 읽으면서 고구마 먹는 기분이 든다.  정의의 사도는 언제쯤 등장할까 싶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극적인 반전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작가와 독자는 스토너를 섣불리 실패자로 낙인찍지 않는다.  사회적 잣대로 보면 그는 분명 실패자임에도,  작가 존 윌리암스는 인터뷰에서 스토너를 실패자가 아닌 영웅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의 삶을 슬프고 불행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어느 정도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 



임종을 앞둔 스토너는 병상에서 "넌 무엇을 기대했나?"라는 질문을 몇 번씩 되뇐다.  소설 말미에 작가가 스토너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가치가  이 질문에서 재확인된다.   돈, 명예, 권력을 모두 누린 사람,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누군가를 짓밟는데 한평생을 보낸 사람,  평생 손해 보는 삶을 살지 않았던 사람,   단 한 번도 타인을 위해 나눔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던 사람.  그들이 죽음을 앞두고 그 많은 것들을 통해 당신은 무엇을 기대했나?라는 질문을 받으면 어떤 답을 내놓을까?  

그 질문에 대한 스토너의 답변이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그의 의식 가장자리에 뭔가가 모이는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좀 더 생생해지려고 힘을 모으고 있었지만,  그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자신이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원한다면 그들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그의 것이었다. 


존 윌리암스의 소설 '스토너' 중  P 503 






1965년의 로맥스는 2022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스토너'를 읽으면서 10장부터 마음이 불편해졌다.   스토너의 동료 교수 로맥스와 스토너의 성향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권력지향적인 로맥스에 반해 스토너는 너무나 학자다운 교수다.  보직을 얻을 기회가 있었지만 

스토너는 철저히 학자로서의 삶에 충실하고자 고사한다.  자신의 연구와 학생들의 논문 지도, 심층적인 수업을 위한 끊임없는 연구가 삶의 전부였던 스토너에게 스승으로서 편법은 통하지 않는다.  그런 스토너의 세미나 수업에 로맥스의 지도학생 찰스 워커가 수강을 하며 갈등이 시작된다.  읽어야 될 자료를 하나도 읽지 않고 가짜로 세미나 보고서를 제출한 워커에게 스토너는 원고를 다시 제출할 기회를 주지만,  오히려 워커는 로맥스의 힘을 빌어 스토너를 비열하고 무례하게 공격한다.   


찰리 워커가 박사과정을 계속 이수할 능력이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위원회가 열렸을 때,  로맥스는 아주 간교하고 치밀하게 스토너의 학자로서 자질을 의심하는 언변을 펼친다.  그와 더불어 찰리 파커는 그에게 희생당한 능력 있는 학생이 되어 있다.  독자는 다 알고 있지만 소설 속의 동료 교수들은 침묵한다.  로맥스가 스토너의 인권을 함부로 짓밟고 폭력을 행세할 때 스토너가 자신의 정당성을 피력하는 방법은 그저 견디는 것이 최대한의 저항이다.  


한 집단에서 정의가 권력을 휘두르는 자에 의해  재편되는 사회.  권력이 정의가 되는 사회는 폭력이다.  그 폭력에 인권이 처절하게 유린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당성이 끝까지 보호받지 못할 때 그 대상이 만약 내가 된다면 과연 우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영문과 학장인 로맥스의 부당함을 알고 있지만 단과대학 전체의 균열이 생기는 걸 염려하는 학장 핀치는 스토너의 친구임에도 적극적 개입을 기피한다.  그는 스토너에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된다는 명분만 심어준다.  




"로맥스가 총장을 꽉 틀어쥐고 멋대로 휘두르고 있네.  그러니까 어쩌면 자네 생각보다 훨씬 더 심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자제는 그저 생각을 다시 해보았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네. 그냥 전부 내 탓으로 돌려도 좋아. 내가 억지로 시켰다고 하게." 


존 윌리암스의 소설 '스토너' 중  P 865 



"대학이 소외된 자, 불구가 된 자들이 세상에서 도망칠 수 있는 피난처라는 얘기를 했어.  하지만 그건 워친구들의이야기가 아니었지.  데이브라면 워커를......  세상으로 보았을 걸세.  그러니까 그 친구를 허락할 수가 없어. 만약 우리가 허락한다면, 우리도 세상과 똑같이 비현실적이고 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은 그 친구를 허락하지 않는 것뿐일세."


존 윌리암스의 소설 '스토너' 중  P 870 




예전에 그의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 그러니까 그가 비교적 잘 아는 학생들조차 그를 만나면 어색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심지어 은근히 그의 기색을 살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중략)  

이제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와 함께 있는 데에도, 함께 있지 않는 데에도 특별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는 친구와 적 모두 자신의 존재를 난처하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일종의 무력감이 그를 엄습했다.  그는 최선을 다해 강의를 했지만, 1학년과 2학년 필수과목의 단조로움이 그의 열정을 고갈시켜 하루 일이 끝나고 나면 완전히 지쳐서 멍해졌다.  그는 강의와 강의 사이에 한참씩 비는 시간을 최대한 메워보려고 학생들과 상담을 잡아 학생들이 안절부절못할 때까지 붙잡아둔 채 그들의 과제와 성적을 꼼꼼히 살폈다. 그의 주위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질질 끌리듯이 흘러갔다.    

존 윌리암스의 소설 '스토너' 중  P 923~ 925 





스토너의 시련은 교수로서의 신념을 정확히 지키려고 했던 그 시점부터 시작된다.  로맥스는 학과장 직권으로 스토너의 강의 시간표로 보복을 자행한다.  스토너가 이제 것 해왔던 상급반 학생을 대상으로 한 '중세 문학 강독'과 대학원 세미나 대신 초보 강사에게나 어울릴 법한 1학년 작문 수업 셋과 2학년 개론 수업 하나를 배정한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강의 시간표를 일주일 내내 묘한 시간대에 배정하는데,  강의와 강의 사이의 간격도 길게 벌어져 있어 그가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을 없애 버렸다.  스토너는 이런 시간표에 전혀 항의하지 않고, 그냥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강의해나간다.  그러는 사이 문제의 원인을 제공했던 워커는 의기양양하게 캠퍼스로 돌아와 악의 적인 웃음을 띠며 스토너를 빈정거리듯 조롱한다.   


'스토너'가 발행된 해가 1965년.  2022년을 사는 지금.  여전히 조직에서 로맥스는 존재하고,  조직의 안정을 위한다는 암묵적인 침묵에 오늘도 스토너처럼 인권을 유린당하는 희생자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거대 기업과 홀로 싸운 땅콩 회항의 박창진 사무장의 외로운 투쟁이 생각난다.  그와 함께 연대하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결국 거대 자본의 희생양은 철저히 개인의 몫이다.  조직의 권력으로 개인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협박하는 현실에 마음이 무겁고, 그 앞에 무너지지 않고 끝내 투쟁하는 이들의 용기는 그래서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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