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에 중압감을 느끼는 수험생에게 기억력은 가장 훔치고 싶은 재능일 거다. 중장년에게 기억력은 삶의 질을 결정하는 건강의 척도일 것 같다. 당뇨와 혈압처럼 기억력 수치를 수시로 확인할 수 있다면 어떨까.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전 세계 치매 환자 수는 5500만 명에 달하고, 매년 1000만 명의 환자가 생겨난다. 65세의 미국인 10명 가운데 한 명이 알츠하이머병 환자이며, 85세가 되면 둘의 하나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있을 거라 한다. 우리 중 절반이 알츠하이머병 환자가 되는 셈이다. 내가 아니더라도 알츠하이머병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로 살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알츠하이머병을 다룬 영화를 볼 땐 더 이상 구경꾼이 될 수 없다. 다양한 캐릭터 속에 '만약'이란 단서를 달고 나를 수없이 대입해 본다.
알츠하이머병은 퇴행성이란 이름답게 65세 이상 노인에게서 나타나지만, 최근에는 40.50대 환자도 늘고 있다. 영화 '내일의 기억' 주인공 사에키는 49세 광고 회사 영업부 과장이다. 그의 사전에 '포기'란 없다. 프로젝트를 위해 PT 기획안 100개를 만들어야 성이 차고, 책상 위에 놓는 서류조차 반드시 정해진 위치에 놓아야 되는 누가 봐도 완벽한 일중독자이다.
8개 회사와의 경쟁 PT 에서 큰 광고계약을 따낸 사에키. 기쁨이 시작된 첫날 사에키의 기억력에 경고등이 켜진다. 매일 보는 직장 동료와 통화하기 위해 전화를 거는데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자식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격이다. 사에키는 전화받은 직원에게 " 동그란 안경에 머리 긴...안경 쓴 코주부 같은 사람을 바꿔달라"라며 기억장애 징후를 보인다.
광고 모델을 상의할 때도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말하려는데 배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배우...이름이 뭐더라?" "몇 년 전에 대박 난 영화에 나온...", "배가 가라앉는 것" 이렇게 배우에 관한 단서를 스무고개로 풀어내는가 하면, 회의 시간이 바뀌었다는 사실조차 기억을 못하고, 같은 물건을 반복해 사오는 등 불길한 예후를 보인다.
정상적으로 나이 들어가면서 발생할 수 있는 기억 저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알고 있는데 혀끝에 맴도는 단어를 단서 없이 떠올리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알고는 있으나 말문이 막히는 설단현상은 대개 40세 전후부터 늘어난다. 사람들이 잘 잊어버리는 순위를 매겨보면 고유명사가 일반적인 단어보다 설단현상에 훨씬 취약하다. 그렇기에 사에키가 지금까지 겪은 상황은 정상적인 노년의 경험이자 기억 체계가 나이 들어가는 신호일 뿐 질병의 신호가 아닐 수 있다.
그렇지만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도 알츠하이머병의 초기 증상 중 하나다. 설단현상인지 알츠하이머병인지 구분하는 기준은 대개 고유명사가 떠오르지 않는 것은 설단현상이고, 알츠하이머병은 고유명사건 보통명사건 차이가 없다. 가령 이런 상황이다. "그거 챙겼어?"/ '뭐"/ "그거 비올 때 쓰는 거" / '우산?"/ "그래 그거!" / 이처럼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이 사용하는 어휘가 점점 단순해진다. 파스타나 사과, 비행기나 버스가 모두 '그거'로 대체되는 것이다.
'자동차 키'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아내에게 계속해서 '그거' 어딨댜고 묻는 사에키의 모습
초기 기억장애의 경우 건망증과의 구분이 쉽지 않지만, 이 단계에서 알츠하이머병 등 치매로 진행될 확률이 10배 정도 높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 단계에서 진단해 가능한 빨리 치료를 시작하고자 하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검사를 받기 위해 진료실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에키 부부
아버지가 알츠하이머병 환자였기에 그 고통이 가족과 환자 본인에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는 사에키의 주치의.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고 절규하는 사에키에게 언제까지나 당신 곁에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의지가 되주는 아내 에미코
이 영화에서는 알츠하이머병의 증상들이 병의 진행에 따라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건망증과의 구분이 쉽지 않은 기억장애와 이름대기 장애 단계를 지나면 길찾기 장애가 나타난다. 평소 자주 다니던 고객회사를 찾지 못해 부하 직원에게 전화통화로 도움을 청하는 장면이 있다. 알츠하이머병이 두정엽을 침범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병이 공간 정보를 처리하는 두정엽으로 퍼지면 환자들은 늘 가던 장소에서 길을 잃는다.
진짜 인생이라 여겼던 회사를 퇴사하는 사에키에게 이름을 적은 사진을 건네면서 잊지 말아달라며 눈물로 배웅하는 직원들
호랑이 보다 무서운 장기 투숙객 '알츠하이머'
광고 회사에 다니는 사에키가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았을 때 관객도 위기의식을 느꼈을 듯싶다. 몇 십 년간 크리에이티브 한 일만 했는데 사에키가 알츠하이머라면, 인지 활동이 치매 예방에 백신 역할을 못해주는 걸까? 그렇다면 알츠하이머병 예방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사에키는 직업 특성상 과도한 스트레스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우리 몸과 마음에 활력소가 되지만 과도한 스트레스는 신경세포, 특히 우리 기억력을 관장하는 신경세포에 때로 치명적일 수 있다.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2형 당뇨, 심장병, 암, 감염병, 통증장애, 공황장애, 우울증, 불면증, 알츠하이머병 등 다양한 질병과 증상을 진행시키는 원인이 된다. 스트레스 그 자체가 생명을 위협하지는 않지만, 지나치게 스트레스에 노출되면 생명을 앗아가는 수많은 다른 원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다독이면서 우리 뇌를 보호하는 방법은 없을까. 요가나 명상, 건강한 식습관, 운동, 마음챙김 수행, 감사, 공감의 행위는 스트레스를 둔감하게 하면서 불안을 건강하게 관리할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준다. 8주 동안 하루 30분씩 매일 명상을 한 사람의 해마가 명상을 하기 전보다 더 크게 커져 있고, 규칙적으로 운동한 사람도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 좋은 예다. 결국 밝고 즐겁게 늘 긍정적인 생각이 스트레스로부터 뇌세포를 보호해 준다는 게 디폴트인 셈이다.
칫솔, 전화 등의 도구 사용이 서툴러지는 증상, 실행증이 병의 진행과정에 따라 나타난다.
알츠하이머병은 근육기억이 저장된 회로에도 침범해 환자들이 전에 할 줄 알았던 것을 못 하게 된다. 옷 입는 법, 화장실 사용하는 법, 양치질하는 법, 음식 삼키는 법도 잊어버린다
질병을 얻으면 그에 따른 통증이 있기 마련인데, 알츠하이머병은 그렇지 않아서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딱히 아프거나 불편한 곳이 없다 보니 사에키처럼 증상이 나타나서 병원엘 가면 그때는 병이 상대적으로 오래 진행돼서 치료가 어려워진다. 대다수 신경과학자들은 알츠하이머병이 베타 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이 시냅스에 찌꺼기를 형성하면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아주 초기 단계의 환자에게는 자각 증상이 없다. 겉보기에 무해한 아밀로이드 찌꺼기가 15년에서 20년에 걸쳐 쌓여가다가 어느 날 한계에 도달하면 분자구조가 무너지고 얽히면서 신경에 염증이 생기고 세포가 죽고 기억이 비정상적으로 소실되는 것이다. 그래서 알츠하이머병이 진행되는 데에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성인의 뇌는 치매 증상이 발생하기 훨씬 전인 30대부터 위축이 시작돼, 40대에 가서는 인지 기능 저하와 나쁜 단백질이 뇌에 축적되기 시작한다. 40대를 넘은 뇌라면 지금이라도 아밀로이드 찌꺼기가 쌓여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퇴적물이 한계에 도달하기 전 이런 형태의 기억 소실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부엌에 내가 뭐 하러 왔더라?"
"차 키를 어디에 뒀지?"
"어제 봤던 영화 제목이 뭐였지?"
내가 종종 겪는 증상이라 섬찟해진다. 하지만 알츠하이머병 증상이 드러날 정도로 아밀로이드 찌꺼기가 쌓이는 데에는 15년에서 20년이 걸린다니 그만큼 예방책을 실천할 시간도 많다는 얘길 거다. 건강한 삶을 위한 단출한 해석이 내려진다. 스트레스를 다스릴 줄 아는 소박한 삶.
'내일을 위한 기억'이 의미하는 것? 사에키의 투병 7년의 기록
기억을 통해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로 살아왔는지 감지할 수 있다. 알츠하이머병으로 개인의 역사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기억이 인간다운 삶을 경험하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알게 된다. 알츠하이머병 때문에 자신의 기억을 내일로 연결할 수 없는 사에키는 지금까지의 내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뇌 과학자 리사 제노바의 말이 생각났다. "살아가는 순간 수많은 순간이 잊히더라도, 그것은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을 기억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런 의미로 해석하면 이 영화의 제목 '내일을 위한 기억'이 무게감 있게 다가온다.
영화 '내일의 기억'은 사에키가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은 2004년부터 2010년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병전 증상들, 진단 과정, 진단 후 진행되는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알츠하이머병이 처음 기억을 잃는 증상에서부터 마지막 단계까지 진행되는데 평균 8년에서 10년이 걸린다. 투병 7년째인 사에키의 표정에서도 병의 진행이 많이 깊어진 걸 짐작할 수 있다.
전두엽과 전두피질의 신경 회로가 손상되는 단계에 이르면 논리적인 생각, 계획, 문제 해결 능력에 장애가 발생한다. 그다음은 기분과 감정을 조절하는 편도체와 변연계가 파괴되면서 슬픔, 분노, 욕구를 절제하기 어려워진다. 뇌가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감정을 더 이상 제어하지 못하게 되는 거다.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의 성격이 난폭해지는 것이 아니라 침식당한 뇌가 감정 폭발과 제어를 감당하지 못할 뿐이다. 사에키의 알츠하이머병 진행이 여기까지 왔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병이 전두엽까지 침범하면 판단력이 떨어지고, 부인이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생각하는 식의 망상, 우울감, 접시로 아내의 머리를 때리는 공격성까지 보인다,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으면 기억을 잃는 것보다 그로 인해 감정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퇴행해서 가족과 사회에 부담을 지우는 일을 걱정한다고 한다. 사에키도 아내의 경제적.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장기보호시설인 요양소를 택한다.
이 영화는 치매환자 보호자들이 환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도 많이 던져 준다. 기억력 저하가 진행되면 환자에게 가르치거나 지적하는 일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환자를 계속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에미코가 사에키의 기억력에 도움을 주기 위해 사진에 메모지를 붙여 반복적으로 일깨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알츠하이머병 후기에 접어든 사람도 여전히 사랑, 외로움, 기쁨, 슬픔, 분노, 평온함 등 인간의 모든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한다. 사에키는 에미코가 전하는 말을 기억하지 못해도, 에미코의 감정만큼은 기억할 것이다.
사에키의 기억력에 도움을 주기 위해 사진에 메모지를 붙이는 에미코
인생이 저물어가는 사에키와 갓 태어나 자라나는 손녀딸의 삶이 대비를 이룬다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은 한 시간 전에 먹은 점심은 기억 못 하면서 50년 전 졸업식에서 먹었던 점심 메뉴는 매우 상세하게 기억하기도 한다. 뇌는 감정을 자극하고 예측을 벗어난 경험을 기가 막히게 잘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아내의 얼굴조차 잃어버린 사에키가 젊은 시절 에미코에게 프러포즈 했던 오쿠나마 가마터를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자신이 만든 아내의 이름이 새겨진 잔을 들고서도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에키에게 에미코는 끝까지 붙잡고 싶은 기억이었나 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내가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어도 마지막까지 하나 갖고 가고 싶은 기억은 무엇일까란 생각을 해봤다.
자신을 찾아나선 아내를 그들의 인연이 처음 시작됐던 장소에서 만난다, 하지만 아내의 얼굴을 이미 잃어버린 사에키.
뇌 과학자 리사 제노바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을까요? 란 질문에 그녀의 답변은 심플하다. "치매가 걱정된다면 건강하게 먹고 열심히 배우고 푹 자세요. 그러나 진짜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신은 자신의 기억보다 더 큰 존재라는 겁니다." 기억을 잃어도 '인지적 비축분'이 크면 사랑하고 사랑받는 기쁨으로 살 수 있다니 결국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다시 화두로 올라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