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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Feb 09. 2024

거장 중의 거장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



https://tv.naver.com/v/5714766



영화의 한계를 뛰어넘는 압도적 걸작 '토리노의 말' 


"예술영화는 대개 지루하다.  불친절하고 답답하다.  카메라는 좀체 움직이지 않는다. '토리노의 말'은 그런 영화의 정점에서 멀지 않다. "  어느 기자가 벨라 타르의 영화 '토리노의 말'을 보고 난 뒤 한 말이다.   흑백의 포스터가 강렬해서 검색을 하게 됐고,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이 영화를 2012년 최고의 외국 영화로  꼽으면서,  "여전히 위대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란 한 줄 평을 남겼다.  그렇게 나는 '토리노의 말'을 만났고, 어느 기자의 평처럼 불친절하고 지루하며 명쾌한 해석까지 할 수 없어 '토리노의 말'이 풀지 못한 수학 문제처럼 뜨거운 감자와 고구마가 돼버렸다. 



영화 '토리노의 말'은 146분이라는 긴 장편영화지만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인 롱테이크로 촬영해,  단 31개의 숏으로 완성됐다.   흑백에 거의 무에 가까운 대사,  전주 국제영화제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를 들어보면 관객에게 또 다른 관전 포인트를 준다.  '토리노의 말'은 벨라  타르 감독의 영화 중에서 가장 사운드가 빛나는 작품이다. 벨라 타르와 함께 작업한 음악가 미하리 비그의 음악도 매혹적이지만, 기후(토리노의 말에서는 황야에 몰아닥친 거센 바람을 뜻한다)를 드러내는 사운드, 인물들의 움직임과 소품들의 움직임에서 나는 미세한 소리까지 잘 잡아낸 사운드가 음악과 어우러지며 일종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만들어낸다.  그 말에 공감하는 것이, '토리노의 말'은 마부와 딸, 말의 이야기지만  대지를 휩쓰는 거센 폭풍도 제4의 등장인물이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광폭하게 휩쓰는 황량한 폭풍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관객을 폭풍 한가운데  가둬놓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



영화는 남자의 묵직한 읊조림으로 시작한다.   "1889년 1월 3일 토리노에서 프리드리히 니체는 문밖으로 나선다. 그런데 길에서 한 마부가 말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니체는 분노로 미쳐 날뛰는 마부를 말리고 말의 목에 팔을 두르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침대에서 이틀을 꼬박 조용히 누워있다가 마지막 말을 웅얼거렸다.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 



하지만 이 영화는 니체가 아닌 말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면 말의 주인 마부와 그의 딸 이야기다. 거센 폭풍이 몰아오는 시골마을 허름한 오두막에서 아버지와 딸, 말이 생활하고 있다.  팔이 불편한 아버지를 위해서 손이 되어주는 딸, 끼니라고는 커다란 감자 한 알이 전부, 하지만 이 생활도 그들에겐  익숙하다..일분 남짓 되는 식사시간이 끝나면  집안의 유일한 창문 앞에 앉아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본다.  

생존을 위한 고된 삶을 잠깐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이다. 그들에게 자연은  생존을 위협하는 가혹한 

형벌이기에  온기 없는 황량한 집조차 그들에게는  유일한 안식처다.



이들의 삶은 다음날이 되어도 다를 것이 없다. 더 이상 나을 것도 좋아질 것도 없는 무의미한 일상, 첫째 날엔 힘겹게라도 마차를 끌던 말이 둘째 날부터는 움직이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다.  노인이 평생 들어왔던 벌레가 나무 좀 먹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들에게도 작은 변주는 있다.  술을 빌리러 온 이웃 남자. 딸이 술을 담는 동안 그는 고립된 부녀에게 세상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라고는 모두 비관적인 것뿐. 세상이 망해간다는 것. 사실 이런 얘길 듣는다고 두렵지는 않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창밖에서 누군가 발견한다.  그들에게 낯선 이는 삶을 방해하는 훼방꾼일 뿐. 집시들은 유일한 식수원인 우물을 점령하고 부녀를 위협한 뒤 몇 마디 저주와 함께 자리를 뜬다. 그때 딸에게 한 권의 책을 건네주는 집시.

그 책이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한 복선을 갖고 있다. 







영화 속 장면을 잡아라 





 그 무렵 부녀에게 큰일이 닥친다. 유일한 식수원인 우물이 말라버리더니 마지막 날엔 기름 가득 든 램프에 불이 붙지 않는다. 물도 없고 불도 없는 캄캄한 돌집에서 부녀는 평소처럼 감자 한 알씩 놓고 마주 앉는다.  대사라곤 거의 없던 아버지가 딸에게 말한다. "먹어, 먹어야 해."  그리고 생감자를 한입 문다.  황량한 벌판에 무섭게 몰아치는 바람과 먹을 것이라고는 감자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부녀.  과연 저런 곳에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을까 싶지만 아버지의 마지막 대사 "먹어.  살아야 한다"라는  장면은  삶을 처절한 투쟁처럼  느껴지게 한다.








밥 먹는 장면 


영화에서 밥 먹는 장면은 총 다섯 번 나온다.  가난한 부녀의 하루 식사는 감자 한 알이다.  첫 번째 날에  아버지가 감자 먹는 모습을 보면 관객도 뜨거운 감자에 대한 식욕이 돋을 만큼 허겁지겁 맛있게 먹는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식욕을 잃어가면서 다섯 번째 날에는 감자를 반밖에 먹지 않고, 마지막 여섯 번째 날에는 아예 감자를 먹지 못한다. 



31개의 숏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아침에 딸이 아버지의 옷을 입혀주고 밖에서 돌아오면 벗겨주는 장면,   감자 두 알을 삶아 식사하는 장면, 그 사이 잠깐 창가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장면,  말의 안장을 씌우고 벗기는 장면, 우물에서 물을 긷는 장면 등 삶의 디테일은 매우 정확하며 일정하다.  등장인물들의 삶은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되면서 영화적인 리듬을 만들어 낸다.  지루한 일상이 일정한 간격으로 삶의 방식이 되어 흐르고 있다. 

밥을 먹는 장면은 먹어야지만 살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표현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첫 대사가 딸이 아버지에게 "식사 하세요"이고,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아버지가 딸에게 "먹어라... 먹어야만 해"이다.   생존의 최소 단위인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으로 인간의 극단적인 절망을 표현하는  '토리노의 말'에서의 밥 먹는 장면은 그래서 강한 임팩트를 남긴다. 

 


영화의 첫 대사
영화의 마지막 대사                                 







이사하는 장면





영화에 등장하는 마부와 딸이 살고 있는 집은 삶과 죽음의 경계이자 다른 세계 혹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곳이다. 유일한 식수원인 우물이 마르고, 불씨도 꺼졌고,  가난한 부녀에게 이제 집은 떠나지 않으면 죽음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됐다.  멀리 나무 한 그루 있는 언덕으로 힘겹게 폭풍을 견뎌내며 달구지를 끌고 가는 부녀. 달구지가 언덕 너머로 사라진다.  그런데 거기서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보고 있다.  관객은 그 언덕 너머로 그들이 다시 보이지 않길 바랐을 거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부녀의 달구지가 다시 돌아온다.  결국 그들에게 다른 세계는 없던 것이다.  결국에 그들이 살아야 할 곳은 이곳밖에 없다는 그것이야말로 가장 절망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이삿짐을 풀고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딸.  창 자체가 고립, 절망, 단절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감독 벨라 타르는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인터뷰했다.  요람에서 나온 인간은 결국 무덤으로 회귀하는 운명론적 시간을 품은 존재다.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가는 그 영원의 시간 사이에 인간은 유를 차지하는 찰나의 삶을 살기 위해 '버티는'시간을 갖는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마부 부녀의 삶은 이러한 버티기의 시간을 의미한다.  감독은 그 변화 없는 일상을 롱테이크로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들에게는 희망도 없지만 그렇다고 절망도 없다.  이처럼 인간이 운명에 맞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투쟁은 죽는 그날까지 묵묵히 살아가는 것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벨라 타르는 '토리노의 말'에 대해서 영국의 영화사이트 'Eye for Film'에서 이런 인터뷰를 했다. 



. '토리노의 말'은 묵시론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일상에 대한 영화다. 인간은 불을 필요로 하고, 물을 필요로 하고, 먹을 것을 필요로 하고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영화 '토리노의 말'에 등장하는 자연은 굉장히 중요하다.  광폭한 폭풍을 맞서고 부딪히는 ㄴ그 자체가 바로 이들의 존재적 의의다. 자연이 있은 후에 인간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벨라 타르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바로 삶의 투쟁은 곧 자연과의 투쟁이라는 사실이다.  






미친 철학자 니체, 토리노의 말


씨네 21 [한창호의 트립 투 이탈리아] 북부 산업의 중심지 토리노 중에서 일부 발췌


프리드리히 니체는 병에 시달렸다. 결국 스위스 바젤대학의 교수직도 35살 때 그만뒀다. 불과 25살 때 임용돼, 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던 자리였는데, 병이 강단 경력을 중지시킨 셈이다. 이후 니체는 건강을 돌보기 위해 맑은 공기를 찾아 여름이면 스위스 알프스의 실스마리아로, 그리고 겨울이면 따뜻한 지중해 연안의 니스, 제노바 등으로 옮겨가며 집필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때, 곧 건강을 걱정하며 떠돌 때, 니체는 필생의 역작들을 써냈다. 니체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는 제노바의 바닷가와 실스마리아의 숲에서 잉태됐다. 니체가 매일 제노바와 그 주변의 해변을 미친 듯 하루 종일 걸은 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를 불과 10일 만에 써낸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알프스와 지중해 도시를 떠도는 방랑 생활과 저술 활동은 서로 비례하며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런데 이런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 발생했으니, 바로 그 유명한 ‘토리노의 말’ 사건이다. 이탈리아 북부의 산업도시 토리노에서 니체는 사실상 철학자로서의 죽음을 맞이했다.



카를로 알베르토 거리 6번지(via Carlo Alberto 6). 이곳이 니체의 주소다. 토리노 시내의 한복판이고,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을 끼고 있는 곳이다(카를로 알베르토는 이탈리아 통일 왕조인 사보이 왕가의 19세기 초 왕이다). 1889년 1월 3일 프리드리히 니체는 토리노에 있는 하숙집 주변에서 산책을 했다. 그런데 광장에서 이륜마차를 끌던 한 마부가 채찍으로 말을 심하게 때리고 있는 것을 봤다. 니체는 갑자기 그곳으로 달려가 마부의 채찍질을 말리고,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 그러고는 쓰러졌는데, 이후 사실상 미친 상태로 10여 년을 살다 죽고 말았다. ‘초인’을 주장하고,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연민을 싸구려 감정으로 질타하던 ‘사자’ 같은 철학자가 매 맞고 있던 말을 (아마도)동정하여 미쳐버렸으니, 이런 아이로니컬한 사건도 없었다.



수많은 전공자들이 니체의 죽음에 대해 설명했다. 채찍에 맞는 말은 수난을 당하는 예수의 은유라느니, 혹은 예수와 대적하여 자신을 ‘안티크리스트’로 여긴 니체 자신의 은유라느니, 많은 말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날 이전에 이미 광기의 조짐을 보인 남자의 행동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더 혼란스러운 미궁으로 빠지는 행위일 테다. 니체의 학자로서의 삶은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끝나고 말았다. 이후 10여 년간은 독일의 고향 나움부르크에서 정신을 잃은 상태로, ‘미친 천재’를 보러 오는 방문객들 앞에 사실상 ‘전시’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토리노의 말’ 사건 이후 니체는 더 유명해졌고, 여동생이 오빠의 유명세를 잘 이용했다. 말하자면 토리노는 니체가 제정신으로 철학에 매진하던 마지막 도시였다.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  첫 장면                                 





벨라 타르와 니체의 니힐리즘 


벨라 타르의 마지막 장편인 <토리노의 말>(2011)은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의 그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그런데 카메라의 초점은 미쳐버린 니체가 아니라, 채찍으로 맞던 그 말에 맞춰져 있다. 니체는 미쳐 누웠고, 그러면 채찍에 맞던 말은 어떻게 됐을까? 이런 질문과 함께 화면은 시골길에서 힘들게 마차를 끄는 늙은 말을 보여준다. 영화는 벨라 타르의 조국인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근처에서 촬영됐다. 하지만 텍스트의 논리대로라면 영화의 도입부는 19세기 말 토리노의 근교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니체의 ‘말씀’(니체는 ‘안티크리스트’로서 자신을 예수와, 그리고 자신의 말을 복음과 견주었다) 가운데 가장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약자’에 대한 공격일 테다. 그 약자에 대한 공격이 지나칠 때면, 니체에게 기독교는 동정심에 근거한 ‘무리한’ 평등주의의 선동이고, 이와 마찬가지로 법 앞에 만인의 평등을 설파하는 민주주의도 인류의 나태와 타락을 부추기는 선동이란 것이다. 말년에 토리노에서 쓴 <안티크리스트>에선 이런 위험한 발언이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넘쳐난다. 니체의 책에서 모티브를 따왔고, 발표 당시 논란을 몰고 온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안티크라이스트>(2009)는 책에 비하면 순진한 수준이다. 숨길 수 없는 사실이자 불편한 사실인데, 니체는 민주주의를 반대한 귀족주의자이고, 귀족의 고귀한 정신과 순결한 피를 믿고 찬양했다(나치들이 니체를 추앙한 첫째 이유가 아마 이것일 것). 그는 말년에 자신이 ‘폴란드 귀족의 후예’라고 떠들고 다녔다.



벨라 타르가 <토리노의 말>을 만든 것은 니체의 ‘말’(言)에 찬성해서일 것 같지는 않다. 혈기방장한 니체가 보면 분명 ‘약자’라고 공격할 늙은 부친과 딸에 대한 연민을 자극하고 있어서다. 제목을 <토리노의 말>이라 해놓고, 니체의 존재를 거의 지운 것 자체가 니체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다. <토리노의 말>은 말에게 채찍질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가난하고 늙은 마부와 딸, 그리고 그 말의 이야기다. 그날의 사건 이후 일주일 동안, 이들이 어떻게 소멸해 가는지의 과정이 벨라 타르 특유의 롱테이크와 세밀한 묘사로 전개된다. 처음엔 말이 더 이상 먹이를 먹지 않고, 우물에 물이 마르고, 사람들도 더 이상 먹지를 못하고, 최종적으로는 오두막집에 모든 불이 꺼지는 결말이다. 사실상의 세상의 종말, 파국인 것이다. <토리노의 말>은 사람들이 나빠지고, 세상이 나빠지고, 그래서 결국 종말로 치닫는 니힐리즘의 정석처럼 진행된다.



‘잘난 니체’보다 사회에서 밀려난 마부와 그 딸의 편을 드는 것이 벨라 타르의 평소의 태도일 것이다(그는 세계화,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마부의 이웃이 나타나, ‘잘난’ 사람들은 과거보다 더욱더 나빠졌고, 거의 모든 나쁜 부(富)를 독점하고, 그래서 세상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마치 니체처럼 포효하듯 말하는데, 이는 니체의 귀족주의를 혐오하는 필부의 웅변으로 봐도 될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벨라 타르는 니체의 귀족주의를 에 둘러 비판하며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예시했는데, 귀족주의를 주장하던 니체도 사실은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던 비관주의자였던 점이다. 논란이 많은 주장이지만, 역설적이게도 파국을 극복하기 위해 니체는 ‘고귀한 정신’의 귀족주의가 도래하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서사 '토리노의 말'


[신 전영객잔]'피로사회'로부터의 도피 ㅣ 김혜리  ㅣ 씨네 21  (토리노의 말 관련 부분 발췌)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은 ‘심심한’ 영화들이 모여 사는 행성에서도 북극점이 될 만한 영화다. 평론가 조너선 롬니가 쓴 대로 타르의 영화는 1분 1초의 질량과 밀도를 체감하게 만든다. 모든 지루한 영화가 그런 능력을 가진 건 아니다. 오직 시간을 지배할 줄 아는 감독만이 지속(duration)을 제대로 그릴 수 있다. 타르의 영화 안에서 우리는 대상이 저절로 본질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는 체험을 한다. 벨라 타르 감독이 마지막 영화라고 공표한 <토리노의 말>은 두 인간과 말 한 마리가 절망을 통과해 종말에 이르는 엿새간의 기록이다. 말하자면 <창세기>의 백워드 마스킹이다. 이 영화는 알려진 대로 니체 말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니체는 마부의 채찍질에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말을 토리노 길거리에서 마주친 다음 발작을 일으켜 10년간 정신착란을 앓다 운명했다. 이 이야기가 암시하는 바는 명백하다(그리고 영화 중반부에 극중 인물의 독백으로 재차 확인된다). 니체는 말의 고집에서 극단의 회의(懷疑)를 보았고, 인간을 포함한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이 처한 근원적 절망을 본 것이다.



<토리노의 말>의 관객은 도입부에서 니체를 쓰러뜨린 문제의 말- 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영화적으로 제시된 말- 이 끄는 수레를 따라 평원의 오두막까지 인도되고, 거기서 나머지 상영시간을 보내게 된다. <토리노의 말>에 등장하는 비루먹은 말은 카프카의 단편에 나오는 단식하는 광대처럼 건초를 거부하며 절망을 시위한다. 광풍에 고립되고 우물도 말라 어차피 굶어죽을 상황인데, 주려 죽기 전에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형국이다. 검은 갈기를 가진 늙은 말이 이 세계에서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최후의 길은 자살뿐이라는 본능적 각성을 묵묵히 실천하는 동안, 주인 집 부녀는 먹고 입고 자기를 어떻게든 반복하며 생존의 동작을 이어간다. 빨래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고 맨손으로 삶은 감자를 벗겨 먹는다.



<토리노의 말>에는 액션이 없다. 행위만 있다. 이 영화는 염세의 서사이기도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예정된 종말을 뻔히 바라보면서 걸음을 옮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서사이기도 하다. <토리노의 말>은 창세기와 달리, 엿새에 걸친 느린 종말 다음에 안식일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를 보는 데에 소요된 146분이 곧 작은 안식일이었음을 마지막 암전 뒤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깨닫는다.



대중은 <토리노의 말>처럼 느리고 재미없는 영화는 관객을 적대시하고 있다고 단정하고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이를 호평하는 평론가들을 위선자라 비난하기도 한다. 시네필들이란 무릇 중뿔난 체질의 소유자들로서 미니멀리스트 예술영화를 볼 때 전혀 고단하지 않거나, 고단하지 않은 척한다는 가정은 그러나 오해다. 영화평을 업으로 삼는 자들에게도 벨라 타르,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지아장커의 영화를 온전히 깨어서 통과하는 경험은 힘들다. 졸리기도 하다. (내 경우에는 <토리노의 말>을 관람하면서 어떤 것을 스크린에서 보고 듣는 행위만으로도 몸이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쉬워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숙련된 관객은 그 피로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우리의 감각을 조정하고 다른 종류의 쾌감으로 들어서기 위한 문지방이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아프지만 제대로 치러야 개운해지는 열감기에 비할 만하다.


https://tv.naver.com/v/5714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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