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튤립 피버'는 관점에 따라 별점 평가가 달라질 것 같다. '튤립 피버'는 거상 코르넬리스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소피아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얀의 치명적 사랑에 중점을 두고 예고편을 만들었는데,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이런 사랑 이야기보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의 뒷골목과 장터, 의상과 소품, 시대상을 그대로 재현해낸 고증에 더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을까 싶다.
1630년대, 17세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는 해상과 무역 패권을 장악하며 신흥 부자를 배출하던 시대이다. '튤립 피버'의 소피아 남편 코르넬리스 산부르트도 당대 '후추의 제왕'으로 불리면서 동방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다. 16세기 유럽에서 향신료는 부르는 게 값인 만큼 인기 상품이었다. 후추가 금보다 더 비싸게 팔리던 시절이라 후추는 당대 향신료의 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튤립 피버'를 두 배 더 재미있게 보려면 당대의 시대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5세기 초반부터 18세기 중반 약 3세기 동안 유럽의 배들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항로를 개척하고 탐험과 무역을 하는 '대항해 시대'를 연다. 개신교 탄압 문제로 1566년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80년간 지속한 네덜란드는 전쟁 중인 1599년에도 인도네시아 항로를 개척해 향료 무역을 본격화한다. 이에 자극을 받은 런던의 상인들이 1600년에 '영국 동인도회사 EIC'를 설립해 동인도 지역의 무역 독점권을 확보하자 네덜란드 상인 들은 2년 뒤인 1602년에 동인도회사 VOC를 세워 영국의 추격을 저지한다.
당시 중앙집권국가가 아닌 네덜란드 공화국이었던 네덜란드는 동방무역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약 14개의 무역회사를 세우고 대규모 무역 선단을 꾸려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자국민끼리의 경쟁이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서로 경쟁하며 후추와 향료를 찾기 위해 인도양에 선단을 파견하다 보니, 현지 매입 가격은 상승하고 본국에서의 판매 가격은 하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대로 가면 공멸하겠다란 위기감에서 네덜란드는 동인도 무역로를 차단한 뒤 여러 회사를 통합할 수 있는 합동 동인도회사 VOC를 세운다.
대항해 시대 무역선박단을 꾸리기 위해선 대규모 자금의 투자가 필요했다. 선박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해적들과의 교전을 위해 군사력도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당시 네덜란드는 선박단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정도의 부를 아직 갖추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네덜란드 정부는 부자들과 국민들에게 투자를 받아 이익을 나누자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투자받은 돈을 한 곳에 모아 놓고 그 자금에 대한 소유권을 나타내는 '종이 권리증서'를 만드는데, 그 증서에 '동인도 회사 주식'이 적혀 있다. 이것이 역사상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 동인도회사이다. 정부는 동인도회사에 무역 독점권을 부여하고 무역대상국과 조약을 체결하러나 무역소 개설, 교전까지도 허용하는 막강한 권리를 부여한다. 최초의 주식회사는 권력과 기업의 경제력이 합쳐진 정경일체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주주들로부터 투자를 받아 이익을 배당하고, 문제가 생기면 투자금 한도 내에서 유한 책임을 지는 주식회사의 개념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1609년에는 역사상 최초로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가 생겼다.
동인도회사의 설립은 세계 패권의 중심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네덜란드로 빠르게 이동시킨다. 주식회사 시스템으로 많은 자금을 모은 동인도회사는 향신료 시장을 장악한 뒤 세계 해상 무역을 장악하지만, 18세기 들어서며 향신료 가격 하락과 시장 쇠퇴, 영국과의 전쟁 패배로 1798년에 해산되면서 국유화된다. 식민지와 교역국에 해악을 끼치며 어두운 면도 존재하지만 자본주의 역사에 주식회사와 주식시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의미는 상당히 크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가장 부유한 국가라네.
수요와 공급이 잘 맞아떨어지지"
코르넬리우스
17세기 동방무역으로 갑작스레 부를 축적한 신흥 부자들은 넘치는 부를 어디에 축적할지 고민에 빠진다. 또 돈을 버는 것 외에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방법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때 투자의 대상이 된 것이 튤립이고 입지와 명예를 다지는 방법으로 유행하던 것이 바로 초상화 그리기였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됐던 17세기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개신교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해나갔다. 특히 문화 강국인 벨기에의 앤트워프 지방에서 가톨릭 개종에 반대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온 이들이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가능케 했다. 17세기 네덜란드 건축을 보면 화려함 보다 소박한 절제미를 추구한다. 건축뿐만 아니라 회화도 마찬가지였다. 가톨릭의 무절제한 화려함을 비판한 신교도들은 종교화에 대해 우상숭배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화가들의 주수입원이었던 종교화의 수요가 줄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네덜란드 화가들은 한정된 수요를 노린 전문화가의 길을 선택한다. 그들이 주로 의뢰받아 그린 그림들은 초상화들이었으며, 초상화에 자신이 없는 화가들은 대중들을 상대로 한 정물화나 풍경화를 그렸다. 이렇게 한정된 주제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다수의 대중을 향해 그렸던 과거의 화가들처럼 안정적인 수입을 얻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렘브란트의 초상화는 그런 화가들의 삶의 고단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부를 누리다 사업에 실패하고 말년으로 갈수록 힘든 삶을 살았던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통해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는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던 과거와 달리 자신의 얼굴에 담긴 진실한 내면을 추구한다.
화가가 되면 먹고사는데 걱정이 없을 정도로 문화소비시장이 형성됐던 그 시기 자식들을 화가 공방 문하생으로 들여놓는 경우가 흔했는데, 렘브란트에게 1호 제자인 헤릿 다우는 생전에 스승인 렘브란트보다 인기가 많은 작가였다. 보통 그림 한 점이 집 한 채 값이었다 한다. 농부도 그림을 팔고 샀으며 빵집 주인도 그림을 소장했다. 그림을 재산으로 여겨 유산목록에 들어 있을 정도였다.
데인 드한이 연기한 얀은 당시에 실존했던 화가 얀 반 호이엔을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라고 한다. 헤이그 출신인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과 거의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얀 반 호이엔은 조용하고 아름다움이 넘치는 회고적인 정경을 보여주는 클로드의 풍경과 달리 간결하고 솔직한 화풍으로 유명하다. 안개와 빛을 교묘하게 조화시켜 따뜻한 회색의 분위기를 조성했던 얀 반 호이엔은 평범한 풍경을 평온한 아름다움이 배어있는 정경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튤립 피버'에서처럼 얀 반 호이앤은 튤립 투기에 빠져 그림 그리는 일도 잊고 지내다 튤립 공황과 함께 엄청난 빚을 안게 됐다고 한다. 이 때문에 죽을 때까지 2000점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고 팔아 간신히 다 갚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덕에 그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다작한 화가로 기록되어 있다.
'튤립 피버'는 영국 작가 데보라 모가치가 쓴 동명의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이다. 17세기 네덜란드에 실재 있었던 '튤립 파동'이라는 사건을 배경으로 17세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사실적으로 재현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당시 투기의 수단으로 활용되던 튤립과 해상패권을 갑자기 거머쥔 신흥 부자들이 속출한 네덜란드의 역사적 상황도 잘 고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튤립 피버'는 남녀의 러브라인보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어우러진 문화코드를 찾아보는 것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다.
네덜란드의 튤립 사랑은 '튤립 버블'이라는 경제학 용어를 만들었지만, 튤립은 네덜란드의 자생식물이 아니다. 터키와 중앙, 서아시아가 원산지다. 현재 튤립의 대표적인 자생지도 히말라야 산맥의 고지대이다. 튤립은 너른 들판이 아닌, 모래와 돌이 가득한 가파른 산악지대, 다른 식물들조차 살아가기 척박한 환경에서 자생한다.
아시아에서 자생하던 튤립은 50여 년 뒤 프랑스를 통해 네덜란드로 전해진다. 암스테르담 식물원의 수석 연구원이었던 식물학자가 약용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식물원에서 재배하는데, 이때 한 대기업에서 식물학자 카를로스에게 튤립을 상업화하자고 제안을 하는데, 이를 거절하자 대기업 담당자는 카를로스 정원에 몰래 들어가 튤립 구근을 훔쳐 대규모 재배에 성공한다. 이렇게 해서 네덜란드의 튤립이 본격적으로 지배되기 시작한 거다.
네덜란드는 자생지와 비슷한 지형과 기후를 갖고 있었고, 마침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시기다 보니 사람들은 갑자기 얻게 된 부를 내세울 도구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튤립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튤립 버블의 시작이 된 것이다.
사랑의 열병이란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튤립 피버'에서 영화 속 화가가 소피아와 도망가서 함께 살기 위해 돈을 마련하려 할 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큰돈을 벌 수 있는 일로 튤립 경매를 시작한다. 소피아의 집 하녀 마리아의 연인 윌리엄 역시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튤립 경매 암시장에서 어렵게 번 돈으로 튤립 투기에 합류한다. 도박판을 연상시키는 튤립 암시장엔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과열현상으로 갑자기 튤립 가격이 폭락하자 버블의 붕괴로 당시 네덜란드 국민뿐 아니라 주변국 투자자들 중 파산자가 나오고 국내외 경제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한다. 최근 우리나라에 과열되고 있는 가상화폐의 가격이 등락을 번복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튤립 열풍과 버블 붕괴의 예로 경고장을 보내고 있다.
튤립 버블로 황금시대가 저물었지만, 그렇다고 튤립 가격이 갑자기 내려가지는 않았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아직은 튤립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튤립을 수출하는데 집중하기 위해 홍보 카탈로그 제작이 시작된다.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의 식물 세밀화가들을 불러 모아 튤립 세밀화를 그리게 됐는데,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튤립 세밀화는 그때 기록된 것이다. 튤립은 18세기 히아신스의 등장으로 인기를 넘겨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