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울퉁불퉁하다
출간된지 10년이 된 책을 읽었습니다.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를 필두로 한 호칭+ 콤마 + 위로형 반말 의 책들이 우후죽순 출간되는 것도 이제 한물 간 트렌드로 여겨지는 마당에, 나온지 10년씩이나 된 책을 읽었습니다. 사실 소설이라면 10년이라는 시간은 크게 뭐라 할 것은 못 됩니다. <엄마를 부탁해>, <도가니>가 10년 전에 나온 소설임에도 불구라고 활발히 회자되는 걸 보면요.
하지만 사회과학 책에게 있어 10년의 시간은 좀...그렇습니다. 시시각각 바뀌는 '지금의' 정세와 경제와 판도를 빠르게 분석하는 것이 사회과학 책을 읽는 의미라고 생각하는 저에게, 2009년에 나온 사회과학 책을 이제서야 본다? 의미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데에 의미가 있다면, '외환위기'와 '일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작년 말쯤엔가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욕을 디지게 얻어먹고 빠르게 스크린을 내렸었죠. 사실 왜곡이 너무 심했다는 게 이유였고요. 전 그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부끄럽게도 아마 영화를 봤어도 아 그랬는갑다 하고 넘겼을 것 같습니다. 외환위기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거라곤 저희 1997년과 금모으기 운동과 우리 아빠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담배를 폈다고 고백했다는 것뿐이거든요.
이 책은 저처럼 외환위기에 대해 막연하게 네 글자 정도만 알고 있었던 사람에게는 큰 스케일을 유지하면서도 자세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친절하지는 않지만, 당시 우리나라 정부가 외환위기의 원인을 무엇이라고 책정했는지, 그렇게 책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주죠. 외환위기가 터진지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쓰인 이 책은, 그 원인을 '세계의 울퉁불퉁함'으로 규정합니다. 세계 정세가, 미국과 한국이, 미국과 남미가 불공평하기 때문에 터진 문제라 그겁니다. 중학생 때 배웠던 외환위기의 원인은 '한창 돈 잘 벌던 시기에 취해서 국민들이 수입품과 사치품을 사재낀' 것으로 알고 있었던 저에게, 사실 문제는 시스템에 있었어! 라는 주장은 일면 새로웠습니다.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의미로 '일본'을 꼽은 이유는, 10년 전에 쓰였기에 가능한 관점이 이 책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 몇 년 사이 우리는 '미중'이라는 단어에 정말 많이 노출됐습니다. 미국이야 세계 2차대전 이후로 항상 그 자리에 있었고, 그 뒷글자에 오는 나라만 몇 번 바뀌었었죠. 그게 최근에는 중국이 되었고요. 그런데 이 책은 일본에 훨씬 많은 주목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일본을 양극으로 두는 구도가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거든요. 일본의 공동체주의에 주목해라, 일본의 아시아모델에 주목해라, 일본의 AMF 설립 움직임에 주목해라, 아무튼간에 일본에 주목해라, 이것 참, 적당히 오래 전 이야기는 이렇게 신선할 수가 있네요.
아무튼 10년 전에 나온 사회과학책을 읽는 데에 의미가 있다면, 적어도 내가 몰랐던 이야기를 하거나, 그 때 그 시절 향수를 느끼고 싶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아, 전지적인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에도 좋겠네요. '현' 오바마 정부라든지, '현' 이명박 정부라든지의 정세를 얘기하는 걸 보며 속으로 대폭소를 몇 번이나 했는지. 하하 언제적 오바마냐~ 지금은 북미정상회담 파토까지 왔다~언제적 이명박 정부냐~박근혜는 탄핵이고 이명박은 보석 석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