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혁명>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모두 요양병원에 있다. 노화 때문에 거동이 불편해지셨을 뿐 아니라 치매도 조금씩 오고 있기 때문이다. 두 요양병원에 드는 우리 집의 비용은 월에 몇 백만원 정도 된다.
외할머니는 입원 전에는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다. 동거 기간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십 년 정도 된다. 어렸을 때는 엄마 아빠보다 할머니와의 스킨십이 더 강했고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내 밥을 챙겨주는 건 주로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를 아주 깊이 사랑한다. 하지만 외할머니를 요양병원에 의탁하기로 했다는 결정을 들었을 때에도, 나는 아주 많이 납득했다.
이 책은 남성과 여성의 젠더 평등을 위해 성 차별 자체의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인 부담 해소에 접근한다. 보육 서비스, 출산 휴가, 가사 노동 같은 것들이다. 고령층을 위해 정부가 제공하는 재가서비스와 요양 전문가 파견에 대한 필요성도 그 중에 하나다. 재가서비스 상품은 굉장히 비싸고, 과거 돌봄을 담당했던 일하지 않는 딸들이 이제는 존재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132)
돌봄에 대한 필요가 적다면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 좀 더 자주 만난다.(239) 우리나라처럼 가족주의 성향이 강한 이탈리아에서 노부모를 돌보는 자녀 비율 자체는 12%로 낮지만, 그들의 돌봄 강도는 주당 28.8시간에 달한다. 반대로 20%의 자녀들이 노부모를 돌보는 덴마크의 돌봄 강도는 주당 2.6시간으로 아주 적었다.(151)
말인즉슨 한번 맡기 시작하면 전적으로 자녀가 돌봐야 하기 때문에 부모 부양에 대한 부담이 큰 이탈리아와 달리, 덴마크는 돌봄에 대한 부담이 적은 대신 훨씬 더 자주 교류를 하게 된다는 말이다.
치매 노인은 아이와 다르다. 아이의 무지는 천진함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성장으로 연결되지만, 치매 노인의 무지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퇴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이와 치매 노인의 곁을 지키는 부모와 자녀의 감정 노동의 결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 가족은 여전히 외할머니를 사랑하고 한 달에도 몇 번씩 할머니를 뵈러 요양병원에 간다. 오렌지나 요플레같은, 할머니가 좋아하는 것들을 사가고 옆에서 까거나 먹여주며 우리한테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고 할머니한테 있었던 일들을 듣는다.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이어지는 외할머니와의 만남이 즐거운 이유는 단순하다. 즐거운 것만 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실례해둔 침구를 한밤중에 빨거나 한사코 거부하는 할머니에게 약을 억지로 먹이거나 자꾸 얼굴이 빨개도록 긁는 할머니를 말리며 실랑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사랑과 정성이 항상 비례하는 건 아니다. 이게 왜 씁쓸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는데 나한테는 그런 느낌이 든다.
치매를 겪는 부모와 그 자녀 사이에 저 문장이 씁쓸하기는커녕 당연하게 느껴지는 시기가 올 수도 있겠지. 그런 시기를 위해 이 책은 쓰여진 거겠지. 책에서 많지도 않은 분량을 차지하는 부모 부양에 대한 이야기가 왜 이렇게 씁쓸하게 다가왔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