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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여행, 연휴

by 고은유

연휴의 시간이란 건 꿈결만큼이나 금방 사라지기 마련이어서 잠시나마 그것을 붙잡기 위해서는 여행이라는 제방을 쌓아야 했다.


떠나지 못하는 나라서, 미리 떠날 준비라고는 하지 못하는 나라서, 결국 떠나지 못하게 되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떠나야했다.


하늘이 도우셨는지 예약하기 어려운 그곳에 딱 하루 자리가 있어(아마도 막 나온 취소표인 듯 했다) 파주에 갔다.


예약할 땐 부푼 마음이었지만 방문일은 연휴의 과반이 흐른 시점이라 마음은 초조해지기 시작한 후였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여행을 떠날 때에도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나이다.


차편을 여러번 갈아타며 다달은 그곳은 사진과 같았다. 단정한 방에는 침대와 책상 위 책들, 그리고 방명록들이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조명등과 나만이 자리한 방안에서 읽고 쓰는 일만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곳에 쌓인 수권의 방명록을 읽다보니, 이 숙소에 묵은 다른 이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공용공간으로 향했다.



호스트님이 따스히 건넨 인사와 뱅쇼를 받아들고 각진 나무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생각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 속에서 태어나고, 서로 겹쳐지고, 뽐내다 한쪽이 사라지고, 결국엔 엉켜버린 그것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공간에는 때론 경쾌하고 때론 잔잔한 오페라 음악이 흘렀는데 우드톤의 가구와 조명이 잘 어우러져 따스함이 밀려 올라오면서 노곤해졌다. (뱅쇼의 영향도 있었겠지.)


차를 가지러 온 누군가가 끓이는 포트 소리를 듣고있자니 우리집도 이렇게 아늑하게 꾸며놓고 거실 한켠에서 육개장 사발면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리고 거실 저편에 주황색 조명의, 좌식 목재 테이블에 마주앉아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한 커플을 보고 있자니 그 사발면을 먹을 때 옆에서 후루룩 같이 먹을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는 소망도 생겼다.


나는 글을 쓰고 있었고, 한편에서는 호스트님과 아까의 커플이 대화를 나누었다. 이쪽에서 새어나간 웃음소리를 듣고 다른 커플도 합류했다.


"책읽다가 여기가 재밌을 것 같아서 저희도 왔어요."


우리는 어느새 다같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아까는 없었던 고양이도 함께였다.





다음날 아침, 챙겨온 철분제를 먹기 위해 가위를 가지러 부엌에 갔다. 어제 본 (첫번째) 커플이 오늘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예쁘게 플레이팅한 사과와 빵을 먹고 있었다. 알고보니 두 분은 그냥 커플이 아닌, 부부였다. 남자분이 "와이프가~"하며 연신 아내 이야기를 하는 게 참 인상적이었다.


가위만 챙기려고 했는데 둘의 모습이 너무 예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여 어디에서 오셨는지, 두분은 어떻게 만났는지 묻다보니 조금씩 서로의 조각들을 건네주고 건네받게 되었다.


그러다 통창으로 보이는 포슬히 내리는 눈발에 마음을 빼앗겨 한동안 창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고보니 여자분과 나는 동갑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니 그 순간과 순간을 이루는 모든 세상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한시간은 훌쩍 흘렀던 것 같다.



편한 친구가 아니면 다음엔 무슨 얘기를 해야할까, 상대방이 편안했으면 하는 마음에 나는 다음에 할 질문을 미리 준비해놓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대화는 창밖에 내리는 눈만큼이나 포슬히 내려와 소복이 쌓였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쉽게도 체크아웃 시간이 다가와 우리는 연락처를 주고받고,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을 마무리하고자.


방명록을 써내려갔다.




2025. 1. 31. 금

무엇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는지.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을 오게 되었는지. 어제부터 줄곧 그 생각을 해왔다.


나 스스로 찾고자 떠났던 길에, 다른 목소리들이 끼어들어 그 방향으로 이리저리 끌려 기웃거리다 지쳤는지도 모른다.


작은 깨달음들은 이제 지겨워. 조금씩 다를뿐이지 비슷한 내용들이니까... 뻔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오만한 걸까, 뭔가 잘못하고 있는걸까. 이 세상에 나 혼자 어설퍼보였다.


이런 어설픈 나를, 나는 달래주는 법을 몰랐다.


나는 계속 모르지 않을까? 자신 없는 내가 반복된다.


나는 어떻게 이곳에 왔는가. 정리되지 않은채 조각조각 쌓인 작은 나의 순간들이, 내 생각과 마음들이, 이제는 좀 정리하여 놓아달라고- 그동안 수차례 시도했었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 회자정리를 강하게 바라며 나를 여기로 데려온 것 같다.


여기라면, '아직도 망설여지고 춥지만 나도 내 모습을 드러내볼게' 하며 큰 마음을 먹은 아이들이 힘을 모아 드디어 해묵은 정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나보다. 어젠 몇시간동안 글을 쏟아내듯이 했고,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좋은 이들을 만났다. 따수운 방바닥에 발을 대고, 포슬한 눈이 나리는 창밖을 바라보고있자니 이 순간을 마음속에 영원히 담아두고 싶은 욕심이 든다.


나뭇가지에 나란히 앉은 두 새들,


이 순간을 마음속 깊은 곳에 잘 심어, 내 삶의 배경으로 삼아야겠다.




아직 현실과의 괴리는 아직 어찌할지 모르겠지만

간직하고 싶은 순간들이 쌓이면

어느새 가벼워져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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