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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삼킨 마음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기.

집이 단식원이 되었다.

by Choi

달달한 바람이 분다. 해가 구름에 반쯤 묻혀있다. 시골 마을 담벼락을 밝게 비추는 정도 볕이다. (베트남 햇빛은 눈조차 뜰 수 없는 땡볓이다 보니 그런 상상 속의 햇빛이 그립다.) 논두렁과 밭 아래에서 그윽한 소똥 냄새도 풍겨 나온다. 큰 바퀴에 진흙이 듬뿍 발라져 있는 경운기 한대가 골목 입구 쪽에 막 정차했다. 구불구불한 좁다란 길을 따라 목적 없이 한 발자국씩 내딛으며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거린다. 크고 기다란 숨을 들이킨다. 잡초 냄새와 풀냄새가 온몸에 퍼져나간다. 토끼풀로 반지도 만들고 머리띠도 만들었던 지난날 어릴 적 추억도 슬쩍 스치고 지나간다.


노랑 개나리 꽃이 담장 너머에 척척 걸쳐진 모양새로 만개해 있다. 동공이 커지면서 '우아'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온다. 커다란 나뭇가지 위에서 참새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깨어보니 환상 속의 휴식이다.


판티엣에서 탁 트인 바닷가 지평선에 반쯤 걸려 있는 태양의 노을을 바라보며 휴식을 느낄 수도 있지만 상상 속 시골 풍경이 더 많은 편안함과 한가로움을 안겨준다. 흙냄새가 그립다. 현재 베트남 4월은 지독한 무더위와 우기가 시작되어 습하고 정말 뜨겁다.


그래서인지 차가운 겨울바람도 맞고 싶다. 두 볼이 벌겋게 얼얼 해지고 코끝이 찡 해지는 추위를 느끼고 싶다. 두꺼운 목도리로 목에서부터 입까지 뚤뚤 말아 올리고 비니 모자를 꾹 눌러쓴 다음 '사리암'에 올라 멀건 된장국과 장아찌에 밥도 한술 떠먹고 시프다. 사리암을 오르다 보면 용감무쌍한 다람쥐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 자그마한 야생 다람쥐가 신기하다. 사리암 다람쥐들은 도가 텄는지 등산객이나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먹을 것을 요구한다. 잣을 주머니에 미리 챙겼다가 돌 위에 올려놓으면 쪼르르 달려와 두 손으로 얌체처럼 집어 먹고는 아는 체도 하지 않고 홀라당 가버린다. 야속한 것.


상상 속에 한국이다. 코로나 덕분으로 올해도 역시 한국은 못 갈듯 하다.

불가능한 휴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렇게 '힐링'이 되는 상상은 매번 하고 싶다. 아직 살림 사는 요령이 부족한 건지 일주일에 5번, 매일 두 개의 도시락을 팩 해야 하는 부담은 냉동식품과 계란말이, 비엔나 소시지로 대체가 안될 때도 더러 있다. 장보기와 저녁 준비까지 해야 하기에 마음이 무겁다. 그래서 나의 한 달 플래너 수첩에는 식단 메뉴와 아이 스케줄로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기사 노릇도 해야 하기 때문에 한번 정신줄을 놓아 버리면 그날은 엉망이 되어 버린다. 그 상황에 고양이 사건 까지 터져 버렸으니 난 정말 '휴식 같은 휴식'이 필요했다.


간절히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뭐를?

'아이 학교 캠프, 3박 4일!'


코로나 때문에 아이 학교 캠프가 2번이나 연장되었고 드디어 4월 아이가 학교 캠프를 갔다.


아~~~~~~~( 제 고함 소리 들리 시나요?)

로또 당첨, 카지노 짹 팟 터진 것보다 기분이 째진다. 물론 사고 없이 아프지 않게 다녀오리라 굳게 믿었다.

모험과 여행, 캠핑을 좋아하는 아이라 분명 환장하듯이 행복했으리라.


'니 애미도 그랬단다'. 아들아.


(주변에서 아이 하나인데 뭘 그리 홀가분해하냐는 말을 저는 수천번 수만 번 듣고 살아요. 그런데요, 외동 자녀 가진 엄마들도 엄마인 건 마찬 가지이고요 이번 생에서는 '한 아이와만 인연이 맺어진 걸 수도 있어요'. 그러니 그분들 입장에서는 아이가 비록 하나이지만, 나름 고충이 있습니다. 당사자들 앞에서는 암말 안 하고 여기다 한마디 적어 봅니다.)


아파트 주민 동생에게서 카톡이 왔다.

'언니, 아저씨랑 시내 나가야지. 밤문화도 즐기고'

'응~ 알았어. 고마워.'


또 한 명이 연락 왔다. 쌍둥이 엄마다.

'언니, 나 지금 시내 나가요. 루프트 탑 혼자 가려고'

'어머. 남편은?'

'바쁘데요. 바람맞았어.'

'아이고. 조심히 택시 타고 들어오셔~'


이번 아이 캠핑 기간 동안은 남들이 이야기하는 분위기 좋은 곳에서 저녁 식사, 둘이 외출, 영화 보기, 맛난 거 먹으러 다니기, 저녁시간 데이트 하기 등등 이 있지만 난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나의 휴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남이 말한 휴식 말고 내가 원하는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기.


주방문을 걸어 잠갔다. 아침은 남편이 알아서 먹고 가기로 했고 새벽 알람부터 모든 시계 알람을 껐다. 암막 커튼을 치고 푹신한 침대와 한 몸이 일체가 되었다. 첫날은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은 냉장고 안 용과, 사과, 블루베리 등 과일로 대충 해결을 했다. 시간제한도 없었다. 3시 신데렐라가 될 필요도, 간식 준비도 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 하교 시간이 3시라서 항상 모든 업무는 2시 정도에 마무리를 지었다. 4일 동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메~~ 좋은 거~


낮잠도 잤다. 저녁은 물회 한번, 팟타이와 뚬 양 꿍 태국 음식 한번, 마지막 날은 양념 치킨 배달로 마무리를 했다. 남편도 피곤했는지 육체를 이탈한 그의 영혼은 넷플릭스와 한국 티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침마다 아이 운동 때문에 6시 30까지 매일 학교에 드롭을 하고 출근하는 그도 지치고 힘들었나 보다. 아이 하나를 늦은 나이에 낳아서 기르다 보니 둘 다 죽을 쑤고 있는 기분이다. 양념 치킨을 먹으며 마시고 싶은 탄산음료 콜라도 마음껏 마셨다. 우린 마구 웃었다. 우리 둘 모습은 비록 소박 했지만, 간만에 휴식 다운 휴식을 취한 기분이었다.


'밖에 나가서 먹는 것도 귀찮다. 그치?'

'야. 근데 집이 이렇게 깨끗했었어?'

'응. 그럼.'

'내일 온다. 그치'

'응. 늦게까지 우리 티비나 보자.'

'그래'


주방 그릇은 하루에 접시 한 개에서 두 개 정도, 가스는 잠겨 있고 , 열심히 돌아가던 가전제품 공장이 올 스톱되었다. 세탁기, 밥솥, 전자레인지, 에어 프라이기, 믹서기 등 모든 것이 멈추었다.

하루에 한 끼 저녁만 먹었다. 그것도 밖에서.


집이 단식원이 되어버렸다.

쓰레기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이가 돌아왔다.

다시 집이 살아 숨쉬기 시작한다.

아이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헌데 거지 꼴로 아들이 돌아왔다. 반가운 마음에 아이를 안았는데 머리에서는 썩은 냄새가 났다. 가방 속 빨래에서는 쉰내가 났다. 맨발로 운동화를 신고 아이가 집으로 돌아왔다. 양말이 빵구났단다.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 줘서 감사했다.


다시 세탁기가 돌아간다.

밥솥이 '맛있는 잡곡밥을 곧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외친다.

김치찌개와 삼겹살을 구워 4일 만에 집으로 돌아온 아이와 저녁을 먹었다.

남편도 나도 처음으로 집에서 밥을 먹었다.


-휴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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