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통하기
트라우마는 아주 조용히 돌아왔다. 내 짝꿍처럼.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널 기다리고 있었어”
아무렇지 않게 내 몸속에 내려앉았다.
삶의 구석 어딘가에 끈적하게 눌어붙어 있다가 일상처럼 가장된 채 나를 조용히 조종하기 시작했다.
호찌민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 나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 일상적이고, 더 평범하게 무너졌다. 머리가 아팠고, 속이 메슥거렸고, 헛구역질이 계속됐다.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신경안정제와 편두통약을 처방받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내 몸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움직였다. 나는 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에너지는 바닥났고, 내 영혼의 기운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생각에 하루 종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전화가 잦아질수록 분노는 더 깊고 무겁게 올라왔다. 명치를 치는 그 분노는, 오랜 시간 참았던 말들이 나를 향해 쏟아내는 폭력 같았다. 한국에 도착하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아주 조급한 얼굴로 내게 말을 쏟아냈다. 노후가, 죽음이, 노년이 두려워 보였다. 급해 보였다.
“아파트 한 채는 팔아서 노후로 쓸 거야.
남는 돈은 남동생과 반반 나눌게.
조건은… 네가 우리 노후를 책임져야 해.
어차피 걔는 뉴질랜드에 있으니, 없는 아들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리고 덧붙였다.
“요즘은 딸도 자식이래. 그래서 엄마가 아빠한테 잘 이야기했어. 딸도 유산 줘야 한다고.”
딸도 자식이란다. 이제 와서야. 이제야. 나는 어릴 때부터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그 말을, 그들의 노후를 책임지라는 말과 함께 들었다. 단 한 번이라도 “우리 딸도 자식이지”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토록 목말라하지 않았을 텐데.
그들은 너무 늦게 말했다.
그리고 너무 많은 것을 이미 해버렸다. 결혼과 동시에 나는 출가외인이 되었고, 그녀는 내가 타고 다니던 차를 ‘자기가 사준 거’라며 가져갔다. 남동생 준다며 가져갔다.
신혼 초, 나는 차 없이 시작했다. 방 두 칸짜리 주공 아파트. 신혼살림도 없이....
그런데 그녀는 내 결혼식에서 활짝 웃었다. “속이 후련하다”라고 했다.
나는 밤새 울었다. 너무 서러워서, 그저 그 차가 너무 아쉬워서가 아니라, 그 말이 너무 아팠다.
동생은 집도, 차도 다 받았다. 아들이라서. 집 한 채 더 물려준다고 했다. 올케가 새로 산 집이 너무 좋다며 광이 날 정도로 매일 집을 닦고 쓸고 한다고 그녀가 말했다. 올케가 너보다 복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나보고 업이 두터워 그런 삶을 산다고 말했다.
이건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그녀는 그 뒤로도 많은 말과 언행으로 나에게 족쇄를 채웠다.
48년 동안, 나는 이해하려고 애썼다.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하지만 지금, 더는 아니다. 아니 더 할 힘이 없다. 나를 완전히 다 사용해 버렸다. 나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 같다. 몸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 같다. 난 살기 위해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대로는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극에 달한 나의 감정은 그녀의 감정을 관통해서 현실로 튀어나왔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무서움, 두려움, 죄책감이 사라졌다. 정신이 맑아졌다.
또렷한 정신으로
또렷한 말투로
두려움 없이
말했다.
그녀에게 더 이상 연락을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바라던 건 돈도, 집도, 유산도 아니었다. 그저, ‘나도 자식’이라는 말. 그 말 한마디였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 늦게, 너무 가볍게 말했다. 마치 계산서의 숫자를 정리하듯, 마치 마트 영수증처럼. 아니, 그녀와 그는 항상 그랬다. 난 항상 뒤통수를 맞았고, 그래서 항상 경계를 하면서 그들과 대화를 해야 했다.
아 피곤하고 힘들다. 이게 정말 가족일까?
40여 년이 넘은 묵은 감정, 서러움이 사라진 건 아니다.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흔들린다. 하지만 그 감정이 내 삶을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제 내가 어떤 딸이었는지보다 어떤 엄마가 되고 싶은지를 더 고민한다. 그리고 아주 분명하게 느낀다. 나는 이제, 그들의 감정에 반응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와서 더 이상 눈물도 흐르지 않았을 때 즈음, 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8개월 동안 다니기 시작했다. 너무 춥고, 두렵고, 무서웠다. 기댈 곳이 없었다. 갈 곳은 그곳, 그 한자리, 그나마 나를 보담아 주는 절이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다니다, 어느 날, 난 깨닫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그녀가 만든 감정 테두리 안에 갇혀 살고 있었다. 나를 지키지 못한 감정, 나를 살리지 못한 감정, 나의 영혼을 짓밟고 억눌러 버린 그녀가 창조한 감정 안에서 내가 살고 있었다. 두렵고 불안했지만, 그게 나인 줄 알았다. 늘 그녀의 감정을 먼저 헤아려야 하고, 그녀의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자신의 감정을 미뤄두며 칭찬을 받는 아이였다. 그게 사랑받는 방식인 줄 알았다. 난 내 고통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말하면, 내가 예민해서 그렇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유별나다는 비꼬는 대답이 나에게 돌아왔다. 난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감정을 삼키고 삼켰다. 병이 왔다. 그랬더니 입이 무겁고 믿을만하다며 칭찬을 해줬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기도를 했다. 그녀가 알려준 대로 절에 매일 나가서 기도를 했다.
호찌민에서는 하루에 108배, 어떤 날은 3일 동안 1000배씩 3000배를 하며 빌었다.
“제발 이 우울함이 아이에게 가지 않게 해 달라고.”
“제발, 나처럼 살지 않게 해 달라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13년을 버텼다.
절을 하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악을 쓰고 절을 했다. 그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맞서 싸우고 또 싸웠다.
하지만 그 절마저도, 훗날 알게 된 건 엄마가 나에게 심어준 맹목적 종교관의 연장이었다. 정작 나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몸은 열심히 움직였지만, 감정은 한 발짝도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엄마의 말투 하나, 표정 하나에 나는 다시 무너졌다. 그녀의 억센 목소리와 비난하고 비꼬는 말투는 호찌민에서 쌓아 올린 내 보호막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가슴이 쿵 내려앉고, 머릿속이 하얘지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목이 죄어오는 느낌. 숨을 쉬고 있는데, 계속 숨이 막혔다. 나는 다시 작은 여자아이가 되어 있었다. 압도되는 불안 속에서 그녀의 기세에 질식당했다. 종일 그녀의 비난 썩인 옛날 말투가 내 귓전을 맴돌았다. 자는 순간에도 목에 통증을 느꼈다. 외상 후 트라우마가 심하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때 다시 '자각'이 찾아왔다. 문제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가 내 안에 심어놓고 간 감정이라는 걸. 그 감정들이 이제는 내 감정인 줄 알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감정을 내가 스스로 만든 줄 알고 책임지려 했던 시간들. 도망쳐도 도망쳐지지 않았던 이유는, 몸은 지금 여기에 와 있지만 감정은 여전히 그 옛집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살아남으려고 애쓴 것이지, 약했던 게 아니었다. 그리고 자각은 항상 고통과 함께 온다. 죄책감은 사람을 조용히 부수지만, 자각은 사람을 천천히 다시 일으킨다. 내 감정을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되자, 비로소 나의 이야기가 되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픈 사람이었다. 불안하고 외로운 사람. 통제와 아집으로 삶을 유지하던 여자. 나는 그 감정의 수신자였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 감정을 내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왔다.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 나도 내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조종당하지 않고,
효도라는 말 아래 침묵하지 않고,
더는 내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그래서 나는
이 감정 감옥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중이다.
그리고 이 글은
그 감정 감옥을 알아보는 이들에게
들어가 있던 문을
밖에서 조용히 열어주는 손이 되기를 바란다.
by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