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

조죠의 일기

by 조죠의 그림일기

건강이 허락하는 한 평생 지속할 스포츠 한 종목, 기분이 내킬 때 자유롭게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 그리고 이 정도를 여유롭게 유지해 나가는 차분한 삶. 내가 꿈꾸는 ‘멋진 어른’이란 이렇게 거창한 느낌이다. 어떤 계기로 이런 구체적인 로망이 생겼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내 주변에 비슷한 사람이 없었던걸 보면 실제 인물을 염두에 둔 판타지는 아닌 듯하다. 아마 그동안 무수히 본 외국 영화 어디쯤에서 주워온 생각이겠지.



운동부터 들어가면 말이 길어질 테니 오늘은 악기 얘기를 하련다. 왜냐하면 며칠 전, 구석에 방치해뒀던 어쿠스틱 기타를 다시 양지로 꺼냈기 때문이다(함박웃음). 이 사연 많은 통기타는 언니가 이십 대 초반에 구입한 것이다(이 문장을 쓰고 둘러보니, 내 주위에 오래되고 값진 물건들은 대개 내 소유가 아니다). 늘 심플함만 좇던 언니가 왠지 화려한 디자인의 기타를 사 왔길래 물었더니, 음악 계통에 종사하던 엄마의 지인분이 악기상가에서 특별히 좋은 소리가 나는 기타를 매우 까다롭게 골라 주었다고 했다. 그런 신뢰감이 퐁퐁 샘솟는 얘기를 듣고 나면 잘 모르는 내 귀에도 이 기타의 소리는 '뭔가 다르게' 들리게 마련이다. 언니 말로는 도쿄에서 잠시 배우러 다녔던 기타 과외 선생님이 이 기타의 소리가 훌륭하다며 자기 것을 놔두고 맨날 뺐어 쳤다나 어쨌다나. 성당인지 교회인지를 빌려서 한 그룹과외였다는데, 그동안 주인을 잘못 만나 한 번도 멋들어진 연주를 해보지 못한 이 비운의 악기가, 자신을 탐내는 기타리스트의 품 안에서 정말이지 끝내주는 소리를 냈다고 했다. 그 무렵엔 나도 일본으로 건너가 언니와 한집에 살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기타를 매고 집에 돌아와서는 잔뜩 흥분한 채 풀어놓던 과외 얘기가 적잖이 부러웠다. 언니는 특유의(쓸데없이) 뛰어난 문장력으로 오후 두시에 사선으로 내리쬐는 노곤한 햇볕과, 느릿느릿 떠다니는 교회 먼지, 선생님이 들려준 달콤한 연주와 설렘을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나는 결국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그 연주를, 서툴게 퉁퉁거리며 연습하는 언니의 기타 소리에 얹어 상상하곤 했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르게 무척 외로운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어쨌든 꽤 오래전에 구입한 이 기타는 언니를 따라 일본까지 건너 갔다가, 한국으로 귀국하는 내 손에 들려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또 한참 구석에 방치되어 있다, 육 년쯤 뒤에 내 손에 이끌려 몇 달간 햇빛을 보게되었다. 당시 내가 아르바이트하던 레스토랑에 작곡가를 꿈꾸는 미청년(중요)이 한 명 있었는데, 둘이서 좋아하는 음악 얘기로 수다를 떨다가 꽤 친해졌었다. 그 친구가 기타로 작곡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집으로 가서 먼지가 수북한 기타를 꺼내들었다. 어릴 때 다니던 학원 선생님한테 반항하고 그만둔 피아노, 학창 시절 불태웠던 사물놀이와 리코더 연주를 제외하곤 처음 마주하는 악기였다. 인터넷을 찾아보며 직접 줄을 바꾸고, 튜닝하는 법을 배우고, 기본 코드부터 조금씩 연습했다. 목표로 하는 곡이 몇 곡 있어서, 한눈팔지 않고 매일 열심히 연주했다. 드디어 내가 치는 기타에서도 조금씩 근사한 소리가 날 무렵, 갑자기 자전거에 꽂혀버린 내가 집 밖으로 나돌면서 또 악기는 먼지 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그때 그렇게나 즐겁게 연주했는데, 쓰다 보니 기타에게 점점 미안해진다.



그리고 며칠 전, 베란다에서 이불에 붙은 고양이털을 떼고 있는데 한쪽에 보관 중인 악기들이 보였다. 전자 키보드와 어쿠스틱 기타 두 개(물론 다 내 게 아니다). 피아노와 기타 모두 배워보고는 싶지만, 조금 더 그리운 기타를 꺼냈다. 언니가 쓰던 예쁜 기타와 또 하나의 낡은 기타. 이 낡은 기타는 이사를 다니면서 전에 살던 누군가에게 잊혀 버려진 것을 엄마가 보관해둔 것이다. 아주 오래되기도 했지만 원래가 입문용으로 나온 저품질의 악기여서 줄을 교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동안 도서관 가는 길에 눈여겨 봐뒀던 악기상에 다녀왔다.



새 기타 가방을 사고 여분의 스트링과 어깨 스트랩을 샀다. 집안에서 연습할 거지만, 잘 치게 되면 흔들흔들 춤을 춰야 하니 어깨 끈은 필수라고 우겼다. 친절한 점원이 이 낡은 기타는 어쩔 수 없이 손으로 튀어 오르는 핀을 꾹꾹 눌려가며 튜닝을 해야 한단다. 엄마는 대학시절 꽤 수준급의 연주를 했기 때문에 지금도 조금만 연습하면 곧잘 칠 수 있다. 몇 년 전에 서너 달 쳐본 게 다인 내가 지금 연주해봤자 좋은 소리가 나지 않을게 뻔하니, 내가 산 스트랩은 낡은 기타에 연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기타에는 연결고리가 한쪽뿐이라, 결국(둘 중에 훨씬 더 좋은) 사연 많은 기타에 어깨 끈을 달았다. 조심조심 그리운 기타를 둘러메고 거울을 봤다. 비록 멋을 부리면 부릴수록 묘하게 더 촌스러워 보이는 나지만, 기타 덕분에 조금은 '간지'에 가까워진 느낌이다(아님 말고).




진짜 음 세개와 코드 하나로 이 곡을 쳤다




요즘은 앱이 너무 잘 나와서 기타 독학이 훨씬 쉬워졌다. 'Simply guitar'라는 앱에 가입해 순식간에 튜닝을 마치고, 한 음씩 기억을 되짚었다. 이 앱, 예전부터 눈여겨 봐뒀었는데 정말 훌륭한 프로그램이다. 초보자가 기타를 잡자마자 코드표를 달달 외우면서 옛날 노래로 연습하면, 당최 재미를 느낄 수가 없기 마련이다.(내가 몇 년 전에 이렇게 연습했었다) 이 앱은 최근 몇 년간 차트에 올랐던 팝 음악에 맞춰, 리듬게임하듯 따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연주를 하게 된다. 오늘 한 첫 강의에서 'Queen'의 'We will rock you'를 음 세 개(1번 줄만 사용)와 Em 코드 하나로 연주할 때는 어찌나 웃기던지 기타를 치는 내내 깔깔 웃었다(내 엉성한 연주와 광기어린 웃음소리에 방에서 일하던 엄마까지 빵 터졌다). 나는 오늘 무려 1단계 레벨에서 다섯 곡을 별 세 개 만점으로 클리어하고, 그중에서도 에드 시런의 'Shape of you'를(너무 재미있어서) 스무 번이나 연습했다. 계속하고 싶었지만 손가락이 너무 아파서 멈추었다. 성냥개비처럼 시뻘개진 손끝을 보니 기타줄을 누른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리운 통증이다. 얼얼한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일기를 쓰니, 설레는 마음이 조금 더 쑥 자란다. 열심히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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