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산책

조죠의 일기

by 조죠의 그림일기

본격적으로 건강에 신경을 쓰고부터, 내가 사는 달맞이 언덕을 중심으로 네 군데의 산책 코스를 개발해 두었다. 개발이랄까, 그냥 같은 풍경이 질릴 때마다 코스를 바꾼다는 얘기다. 참고로 최근에 가장 빠져있는 건 오늘 다녀온 '도서관 길'.



비 예보가 있는 날엔 기본적으로 밖에 나가지 않지만, 오늘까지 도서관에 반납해야 하는 책이 있어 집을 나섰다. 밤부터 큰 비가 내린다고 해 우산을 챙겼다. 우리 집은 툭하면 해무에 잠기곤 하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짙은 먹구름이 모든 색을 빨아들여 시야가 온통 흑백으로 보였다. 집에서 도서관까지는 느린 걸음으로 왕복 2시간이 걸린다. 운동 삼아 다녀오기엔 딱 좋은 거리지만, 비를 맞으면서 갔다면 도중에 포기했겠지. 집 앞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가로수가 울창한 넓은 보도블록이 나오는데, 그길로 장산을 마주하고 걷다 보면 어느새 도착하게 된다. 도서관 뒤 장산 인공 호수까지 이어진 계곡을 따라 양쪽으로 풀숲이 무성한 산책길이 있다(이 물줄기의 이름을 최근 들어서야 알았다. '춘천'이란다). 한여름에도 나무 그늘이 시원해서 나는 종종 이 곳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다. 늘 한량처럼 대낮에 다니던 길을, 해가 져서어두워진 시간에 책과 우산이든 배낭을 메고 라디오를 들으며 걸었더니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늦은 밤에 걷는 길로는 미포에서 출발해 해운대 바닷가를 지나 동백섬을 돌아오는 왕복코스가 있다.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탓에 연중 밤새도록 사람이 바글바글하고 대낮처럼 환하다. 여자 혼자 밤늦게 운동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번화한 해변을 지나는 동안 온갖 종류의 강아지부터 어린아이, 노인, 외국인, 커플, 대가족 등 별의별 사람들을 다 볼 수 있다. 집순이가 세상 사람들을 관찰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혼자 머릿속에 틀어박혀 있다가 해운대를 걸으면 꿈에서 깨어나 따끔한 현실로 돌아온다. 동백섬을 한 바퀴 도는 것은 아주 잠깐이면 된다. 어두운 밤 흐릿한 달을 바라보며 조용한 산책길로 들어서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에 묘사된 '두 개의 달이 뜨는 평행우주'로 넘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호텔이 빼곡한 해변과 대조적으로, 야생 토끼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어둑한 숲이 그런 묘한 감상을 주나보다. 이섬을 걸을 때엔 귀에 꽂은 음악을 잠시 꺼보시길.



왠지 조금 비현실적인, 밤의 동백섬



세 번째는 달맞이에서 시작해서 달맞이에서 끝나는 '문탠로드'가 있다. 복잡한 달맞이의 골목길만큼 여러 갈래로 뻗어 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갈지는 오롯이 걷는 사람이 정해야 한다. 말 그대로의 숲속을 걷기 때문에 가장 가까이서 자연을 느낄 수 있다. 다만 비가 온 다음날엔 신발이 온통 진흙 범벅이 되어버리니 황토색 신발이 필요없는 사람에겐 추천하지 않는다. 이 길은 일출 직후가 가장 아름답다. 한 번은 여기서 일출을 보려고 어두운 새벽에 나왔다가 시커먼 숲에 겁을 먹고 꽁무니를 뺀 적이 있다. 이토록 무서운 검은 숲에 태양이 떠오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눈부신 황금색으로 반짝인다.



네 번째 코스는 미포부터 송정까지 얼마 전에 새로 조성된 산책로, '블루라인파크'이다. (...) 블. 루. 라. 인. 파. 크. 이름을 좀 잘 지을 수 없었을까, 정말 촌스럽다. 처음엔 고즈넉한 기찻길을 '지들 멋대로' 뜯어고친다며 호되게 디스 했던 나지만, 얄팍하게도 지금은 일주일에 두세 번씩 애용하는 길이 되었다. 딱딱한 보도블록이 아닌 부드러운 나무 데크가 깔려있어서 발목이나 무릎에도 부담이 없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운이 아주 좋다면,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대마도를 볼 수 있는데,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섬이라 볼 때마다 놀란다. 이 길이 새로 닦인 이후로 조금씩 주변 마을이 변화하고 있다. 부지런한 주민들의 손길로 살뜰히 개발되어가는 모습이 소인국의 심시티를 연상시킨다. 송정에 도착해서 한가롭게 떠있는 서퍼들을 구경하고나면 에너지가 충전된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평평한 길보다 산길을 구불구불 넘는 쪽이 보람차다. 내가 멋대로 '나무 터널'이라고 부르는 그길은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에 숨이 턱까지 차오르지만 풍경이 너무 예뻐 불평도 나오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한 나무가 양쪽에서 드리워져있다. 사람들은 벚꽃 사진을 찍기 위해 방문하지만, 나는 초록빛 생명이 폭발하는 한여름의 이 길을 제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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