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불안

조죠의 일기

by 조죠의 그림일기

언니가 몇 년 전에 구입한 맥북 프로를 반쯤 물물교환으로 물려받아 지금은 내가 사용하고 있다. 고장 나서 화면은 나오지 않지만 다른 기능은 멀쩡해서 별도의 모니터를 연결해서 데스크톱처럼 사용한다. 화면이 나오지 않으니 별수 없이 대형 모니터와 케이블을 치렁치렁 달고 있다. 맥북의 시크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영상편집용으로 맞춰진 이 노트북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고사양이라, 지금처럼만 사용하면 앞으로도 몇 년은 유용하게 쓸 수 있을 물건이다. 그림 주문이 들어오면 중반 작업까지는 애플 펜슬과 아이패드 프로로 충분, 마무리 작업만 컴퓨터로 불러와서 레이아웃이나 세부 디자인을 만진다. 그래서 일할 때도 컴퓨터 사용시간이 적은 편이라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근데 웬걸, 이제사 큰 비용을 들여 노트북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이유가 '글을 편하게 쓰고 싶어서' 라니.


계속 모른 척 덮어뒀던 케케묵은 러시아 여행기와 카툰 에세이를, 백수 5개월 차쯤 되니(놀 만큼 놀았는지) 할 마음이 생겨 슬슬 뒤적거렸다. 조금 긴 호흡의, 나름 완결 같은 것이 있는 이야기라서 몇 달씩 고민하다가 우선 글이라도 매끄럽게 정리해 보기로 했다. 그림을 그릴 때면 흰 종이에 쫄아 주눅이 들기 마련인데, 글쓰기는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쫄 경험 자체가 없어서인지 시작이 수월했다. 글, 그림 둘 다 백지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뜨끈한 창작의 고통(?)이 따르지만, 희한하게 피부에 와닿는 감촉은 판이하게 다르다. 내게 그림은 육체노동에 가까워서, 한 장을 공들여 완성하고 나면 진이 빠져 한동안은 새 그림을 이어 시작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안팎으로 충분히 휴식을 취해줘야 다음으로 넘어갈 마음이 생긴다(솔직히말해 좀 성가시다). 반면 글에는 어떤 리듬 같은 것이 있다. 일단 앉아서 쓰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몰입하게 되고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쓰고, 읽고, 고쳐 쓰는 과정을 반복하면 잠에서 깨어나듯 뇌가 흥분한다. 마치 나를 완벽히 이해하는 이상적인 친구와 밤새도록 와인을 마시며 수다 떠는 기분이 든다. 그림에 비해 체력소모가 덜하달까? 무엇이든 몇 시간씩 계속하다 보면 허리와 어깨가 삐걱거리지만, 봐주는 사람도 없는데 미친 듯이 즐거운 쪽은 압도적으로 글쓰기다. 뭐야... 나 사실 글 쓰는 거 좋아하나? 이 늦은 질문을 서른 두 살에 중얼거리고 있다.


노트북 얘기로 돌아가서. 1년 동안 마음껏 놀기 위해 따로 빼둔 저축에는 당연히 맥북프로의 상판 교체라는 큰 비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수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만 막상 목돈을 건드리려니 상당히 주저하게 된다. 퇴사 후 게으른 생활을 해서인지(아니면 엄마 말대로 그냥 노화 탓인지), 올 초에 허리와 어깨가 작살이 나면서 한 자세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별수 없이 스탠딩 책상, 보통 책상, 그리고 좌식책상을 모두 준비해 두고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글을 끄적이게 되었다. 그와 함께 매번 모니터와 본체(ㅋㅋ), 기타 부속 일체를 들어다 옮기고 설치하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을 반복해야 했다(옮기는 중에 허리가 더 아파온다). 이렇게 내 양심에 들 핑곗거리가 많아지는 걸 보니 맥북 프로를 고칠 때가 온 것이다.


이 사치스러운 노트북의 옛 주인이자, 글을 써서 먹고 살아가는 언니에게 화면을 고치겠다고 얘기해 봤다. 너 별로 쓰지도 않잖아- 정도를 예상했는데 대뜸, "잘 생각했다. 그럼 너 이제 카페 가서 글 쓸 수 있겠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보통 때도 내 상상 보다 현실의 언니가 훨씬 친절한 편이긴 하다). 세상에, 그동안 못 해본 '맥북 카페 허세'를 부릴 수도 있다는 말?!(이런데 약하다) 이것은 직업 글쟁이에게 공식적인 허락을 받은 거나 다름없다고 마음대로 정하고 AS 센터에 예약을 잡았다.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왜곡된 자매님의 한마디


젊고 친절하고 굉장히 차분한 남자분이 '메카닉'이라는 그럴싸한 명찰을 달고 내 맥북프로를 진단했다. 언니에게 들은 바로, 단순한(그리고 더럽게 비싼) 모니터 고장이라 상판을 교체해야 한다- 정도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 새 상판으로 테스트를 진행했다. 웬걸? 작동 안 함. 문제는 상판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언니도 나도 예상견적에 지레 겁먹고, 정밀검사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정확하게 고장 난 부품을 찾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걸린다며, 일단 오늘은 노트북을 맡겨두고 다음날 찾으러 오라고 했다. 매사에 시원시원 대답해버리는 편인데 노트북을 맡겨야 한다는 말에 깜짝 놀라서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분이 다시 설명하며 나사를 조이는 와중에도 내가 계속 버벅거렸기 때문에, 센터가 한가한 시간에 재방문 예약을 잡게 되었다. 오래 걸리겠지만 내가(시간 많은 백수이니) 다시 와서 점검하는 동안 기다리고 있는 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조립한 노트북을 들고 이상하게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매사에 천하 태평인 내가 어떤 포인트에서 이렇게 놀란 걸까 생각해 봤다. 엄마는 혹시라도 누군가가 부품을 가로채거나 얕은수를 부리지 않을까 걱정되는 거냐고 물었지만 별로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닐 거다. 그냥 머릿속이 멈춘 채 어버버 거리고 있었으니까. '메카닉'이라는 명찰을 눈으로 읽고 있던 찰나에 홀라당 해체되어 속살을 드러낸 내 노트북을 보는 것이, 마치 모르는 사람이 내 속옷을 개고 있는 장면을 보는 듯했달까. 수리기사라고는 하지만 낯선 이의 손에 이렇게 개인적인 물건을 맡기는 일에는 꽤 큰 용기가 필요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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