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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진 Jan 15. 2020

카드 78장

그리고 그만큼의 모래



     도톰한 벨벳 위에 가지런히 놓인 카드들. 앞면을 볼 수 없게 뒤집어져 있다. 앞으로 내가 겪고 느낄 것들이 무엇일지, 내 삶이 어떤 것들로 채워질지 생각하며 걷던 중 “카드 78장”이 스쳤다. 세상은 내게 78장의 카드인 것이다. 왜 78장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내게 주어진 그 카드들을 모두 뒤집어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카드는 예언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내게 ‘어떤 자국’이 생기면 그때서야 뒤집힐 것이다. 세상은 넓고 무한하다. (정말?) 내게 주어진 세계를 만끽하고 싶다. 빙하의 냄새를 맡고 싶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사하라 사막의 모래를 느끼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종이 위에, 스크린 위에 전사하고 싶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보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가능한 한 자주 안아주고 싶다. 내게 주어진 카드를 기꺼이 모두 다 뒤집고 싶다. 지금까지는 열다섯 장 정도를 뒤집었겠지, 생각하며 산책을 계속한다. 어느덧 광화문이다. 




카드 78장 

78cards




표류


     나는 항상 하고 싶은 것, 알고 싶은 것을 노래하며 살아왔다. 그게 적어도 78가지는 된다며 이 글을 열었다. 그런 내게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겠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은 표류의 시간이 조용히 찾아왔다. 방향을 잃은 것은 물론 손을 뻗어 헤엄칠 의지조차 없는 것 같았다. 카드 더미에서 조용히 손을 뗐다. 뒷장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애초에 내게 카드가 있었나?

내 안 어딘가의 마개가 뽑혔다. 무언가가 내게서 졸졸 흘러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빠져나가는 물들, 모래들, 숨들, 그게 무엇이든 얼른 마개를 찾아서 다시 막아야 할 텐데. 이것들이 모두 빠져나가면 나는 어떻게 될까? 그 구멍이 어디에 있는지도, 어떻게 막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표류하며 내 안의 것들을 흘려보내던 중, 아주 커다랗고 파란 바다가 보고 싶었다. 지난여름에는 저 멀리까지 걸어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낮은 바다가 보고 싶어, 내가 아는 가장 낮은 바다로 찾아갔었다. 이번에는 아주 높고 커다란 바다가 보고 싶었다. 파도 소리가 자꾸 귀에 일었다. 며칠 애달파 하다가 동해행 티켓을 끊었다. 




질문들


     급작스러웠지만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항상 가던 산책길 가는 느낌과 비슷하면서도, 알 수 없고 이상한 마음이었다. 흐렸다. 비가 온다고 했고, 나는 기꺼이 비 내리는 바다에 서 있길 고대했다. 터미널에서 호텔 근처까지 30분을 걸었다. 거리는 회색빛에 조용했다. 차도 사람도 적었다. 모두 어디로 떠난 것 같았다.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아 스타벅스로 갔다. 넓은 테이블 한편에 자리를 잡고 일기를 썼다. 한참 쓰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앳된 얼굴의 여자 아이였다. 누군가를 인터뷰 해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냐고 했다. 내가 뭘 해야 하냐 물으니 인생에 대한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하면 된다고 한다. 경계하며 대답을 잠깐 미뤘다. 그녀에게 그 외에 다른 목적은 없어 보여 흔쾌히 승낙했다. 그녀는 정말 고마워하면서 다른 친구를 데리고 왔다. 바로 옆 여자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거듭 떨린다고 웃으며 노트북과 종이를 펼쳤다. 동해에 도착한 지 이제 겨우 한 시간, 앳된 얼굴의 탈을 쓴 세상이 내게 질문을 하겠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최선을 다해 솔직하게 대답하자 다짐했다.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 힘들었던 때, 가장 서럽게 울었던 때, 후회되는 것,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 어떤 때에 시간이 빨리 흘렀다고 느끼는지, 인생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편집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살면서 가장 잘한 일, 하루하루를 잘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언제 어른이 됐다고 생각했는지, 묘비에 어떤 말을 넣고 싶은지”였다. 다른 질문에는 다 답했으나, 마지막 묘비 문구는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아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친구들의 사진을 두 장 찍었다. 필름 현상을 하면 이메일로 보내주겠다고.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받았다. 내가 더 고마운 마음이었다.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닌 듯했다. 흔한 내용일지언정 이 질문들을 받으려고 급작스레 동해에 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벌써 바다를 본 것 같았다. 

친구들은 돌아갔고, 다시 일기장을 펴서 방금 일어난 일을 써 내려 갔다. 일기를 쓰다가 묘비 문구로 좋을 것 같은 문장이 떠올랐다. ‘이걸 대답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하던 중에 친구들이 파이를 사 들고 다시 찾아왔다. 나는 반가워하며 마지막 질문의 답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그들은 화색을 띠며 내 마지막 답변을 받아 적었다. 우리는 두 번째 작별 인사를 했다. 파이를 소중히 받아 호텔로 향했다. 




바다 


     호텔 방 문을 여니 바다가 보였다. 너무 조용해서 마치 진공 상태로 들어선 것 같은 나는 바다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봤다. 여기저기 펼쳐진 넓은 바다가 아니라, 집어서 쓰다듬어 볼 수 있을 것 같은 바다였다. 카메라로 방을 담았다. 물건들을 꺼내 가지런히 뒀다. 창문을 여니 파도 소리가 크림색 커튼을 비비며 들어왔다. 나가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지만, 호텔 바로 앞 해변에 갈 참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작은 해변으로. 

     가는 길은 조용했다. 여전히 남겨진 마을 같았다. 바다로 가려면 높다란 다리 옆을 지나야 했다. 다리 아래로는 깨끗하지 않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강의 어느 하수구를 닮았다. 바다를 볼 수 있을까 의심하며 아주 조금 더 걷다 보면, 오래된 카페가 정면에 보인다. 그 옆에 바다가 있다. 바다. 

     그렇게 보고 싶던 바다였는데, 마음과는 다르게 쭈뼛대며 입장했다. 뒤로는 낡은 아파트가 보였다. 바다는 작고 지저분했지만, 해변 양옆으로 암벽과 나무들이 있어 아늑하고 멋스러워 보였다.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았다. 누군가 여기에 온다면 그 이유는 이 바다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단지 바다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파도가 컸다. 솟아나고 무너지고, 순서를 지키다가 가끔 막무가내로. 어떤 모양을 완성하려다 금새 몰락했다. 모노드라마처럼, 캉캉 댄스의 나풀대는 치마처럼. 

     사진을 찍으려고 쪼그려 앉았다가 밀려오는 파도에 바짓단을 젖혔다. 웃음이 났다. 몇몇 사람들이 찾아와 잠깐 머물다 갔다. 군인과 그의 여자친구, 중년의 남녀, 외국인들, 그리고 나. 분명 처음 듣는 파도 소리였다. 깊은 곳에서부터 긁어대며 오르는, 한껏 움츠렸다가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쏟아내는 그런 소리. 천 명이 쏘아대는 활 같은 소리. 장엄하고 낮은 파도 소리. 





     추워져서 카페에 들어갔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바다를 봤다. 잠시 후면 달이 뜰 것이다. 해는 강하고 선명하게 뜨지만 달은 그렇지 않다. 달은 아주 희미하게 찍힌 도장처럼 모습을 드러냈다가 선홍색으로 안쪽이 채워지고, 노랗게 선명해진다. 바다로 나와 달을 지켜봤다. 크고 환한 보름달이었다. 해변에는 어린아이와 그의 아버지도 있었다. 두 사람은 바다를 가까이 보려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파도는 아이가 너무 반갑고 귀여웠던 나머지 급작스러운 포옹을 했다. 아이는 깜짝 놀라 크게 울었다. 신발이 다 젖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이를 달래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래도 떠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거세게 움직이는 바다와 둥근 달을 바라봤다. 나는 조금 더 뒤에서 그 모든 것들을 함께 봤다. 아름답고 따뜻한 저녁이었다. 파도와 칭얼거림, 그것을 얼러주는 따뜻한 것들이 있는 밤이었다. 




남색 벨벳 위의 생


호텔 방에서 바라보는 밤바다는 까만 벨벳 커튼이 아주 높게 달린 커다란 무대 같았다. 그 위에서 수만 개의 보석들이 반짝인다. 큰 배 한 척도 앉아 있었다. 높게 오른 보름달이 바다를 비췄다. 선물 같은 풍경이었다. 

나른해진 마음으로 오후에 받았던 질문들, 꿈, 가족,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나와 내 몸을 사진으로 담았다. 매일 변하면서도 내가 나일 수 있게 지탱해주는 이 얇은 막들. 단단하지만 연약한 황갈색의 울타리들을 보면서 시간과 삶을 더듬어봤다. 이전과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것이 이 피부를 거처 삼아 이루어질 것이다. 쪼글쪼글한 나이테가 둘러질 내 손에서부터. 매 순간순간 변형하면서. 따뜻한 온도의 ‘생’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밤이었다. 여전히 들리는 파도 소리도 내 생각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체크 아웃을 하고 몇 년 전부터 가고 싶었던 해변으로 향했다. 일 때문에 우연히 들른 곳이었는데, 이후 종종 생각이 났었다. 변함없이 그대로 있었다. 반가움에 행복한 탄식이 나왔다. 해변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고 길었다. 멀리 해변을 청소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앞으로 조금 더 나아가니 억수 같은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세계


     해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필름 카메라를 세게 떨어뜨렸다. 렌즈가 다 부서져야 마땅할 만큼 큰 소리가 났다. 겉은 괜찮아 보여 정말 다행이다 싶었는데, 사진을 찍으려고 뷰 파인더를 보니 안이 망가져 있었다. 가슴이 시렸다. 왜 조심하지 못했을까 후회됐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곧이어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찬 커피를 마시며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카페에는 동네 주민과 여행객들이 적절히 나뉘어 앉아 있었는데, 나는 주민도 여행객도 아닌 이상한 경계에 있는 기분이었다.  

     비가 잦아들어 카페에 짐을 맡기고 바다를 보러 나갔다. 상아색이었던 해변은 비에 젖어 고동색으로 변해있었다. 먹구름이 잔뜩 껴서 하늘은 낮았지만, 더 웅장하게 느껴졌다. 새로워진 풍경에 기분이 환기됐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바다 가까이 갔다. 밀려오는 파도에 발끝이 닿을락 말락 했다. 어느 여행객에게 부탁해 내 사진을 두 장 남겼다. 그러다 비가 또 쏟아져 카페로 뛰어갔다. 전날 머물렀던 호텔에 다시 예약하고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카페 주인이 따뜻한 커피를 선뜻 내주시고, 직접 찍은 바다 사진들도 보여주셨다. 베풀어주신 친절 덕분에 낮부터 느껴지던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살짝 풀어졌지만, 카메라가 망가진 것과 바라보기엔 멋있지만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쏟아지는 비, 작은 고립감 때문에 여전히 조금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하루 더 머물다 가는 게 맞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진심으로 동해에 조금 더 있고 싶었다. 알 수 없는 기분에 스스로 조금 당황하면서, 빗물에 뭉개지는 창밖 풍경을 바라봤다.






     먹구름 때문에 날은 더 빨리 어두워졌다. 오후 5시였다. 택시를 불러 호텔로 갔다. 알 수 없는 기분은 그대로였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누군가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 알 수 없던 무거움과 구름이, 고장 난 카메라가, 가슴 아픈 비보와 함께 내게 내려앉았다. 차창의 빗방울은 서로 엉겨 붙었다가 미끄러져 달아났다. 어제는 온기와 생이었다면, 오늘은 상처와 죽음이었다. “그저 공평하게 보여주려 했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언가가 낮게 속삭이며 어깨를 들썩이는 것 같았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들어갈 호텔 방이 낯설게 느껴졌다. 조용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기분이 안 좋았다. 실제로 어제 묵었던 방과 달랐고, 내가 느끼는 마음도 완전히 달랐다. 

     잠깐 가만히 앉아있다가, 슬프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옷을 갈아입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왔다. 둥근 달이 분명 어제와 비슷한 자리에 떠 있을 텐데, 구름이 잔뜩 껴서 달무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파도 소리는 그대로 있었다. 목욕했고, 일기는 쓰지 않았다. 티비를 보다가 가지고 온 책을 폈다. 문장들이 마음에 와 박혔다. 박힌 문장들이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삶과 죽음을 곱씹으며 70대 노인의 글을 읽고 있었다. 평생 쓰던 글이 더는 써지지 않아 고뇌하는 작가의 수필이었다. 






     공사 소리에 잠에서 깼다. 바다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하는 독서가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어젯밤보다는 한결 나아진 기분이었다. 우리의 삶이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을까. 78장의 카드를 생각했다.

     호텔에서 나와 첫날의 작은 해변으로 갔다. 어제의 비는 지워지고 하늘은 맑았다. 서울로 출발하기까지는 3시간 정도가 남았다. 바다 앞에 잠깐 서 있다가 이 작은 해변의 유일한 등대 같은 그 카페에 들어갔다. 동해를 떠나기 전 몇 장 남지 않은 책을 다 읽고 싶었다. 한 문단 읽고 바다를 보고, 이어서 한 문단을 읽고 다시 바다를 봤다. 그러다 이 책의 책갈피로 쓰던 윌리엄 터너의 그림이 지금 내 눈앞의 해변과 닮은 느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재미있는 것은 터너의 그 그림에는 해변이 없다. 

     나는 다시 창밖을 본다. 다리 아래로 내려온 물이 해변으로 흐르고 있었다. 파도는 만들 수 없는 자국을 해변에 그리며 바다로 흘러간다.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있었다. 




메멘토 모리


     책의 마지막 문단과 첫 문단을 한 번 더 읽고 바다로 나갔다. 동해에 머문 3일 중 가장 파란 하늘이었다. 아이폰으로 파도 소리를 녹음했다. 녹음하는 중에 기차 소리가 들려서 홱 돌아봤다. 좌석을 창 쪽으로 돌려놓은 작은 관광용 기차였다. 기차를 보고 나서야 철로가 거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를 본 누군가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따라서 손을 흔들었다. 찰나의 순간, 스쳐 가는 기차 안에서 내게 손을 흔드는 사람, 분명 내겐 풍경이었고 어떤 암시였다. 그 사람에게 보였을 나와 바다의 모습이 그려졌다. 작은 해변 한가운데서 파도 소리를 담고 있다가 기척에 뒤돌아보던 나도 그 사람에게 풍경이었을까? 삶을 채우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받은 인사에 늦지 않게 손을 흔드는 것. 오래 망설이지 않는 것. 서로에게 어떤 풍경이 되는 것. 우연한 인사에 명랑한 기분이 되었다. 하늘은 아주 파랬고 볕은 더욱 강해져 모래 위의 내 그림자가 점점 짙어졌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다. 쾌활한 마음으로 해변을 빠져나가면서 동물의 사체를 마주했다. 해변에 있는 나뭇가지, 버려진 낚시용품, 조개껍데기들 사이에서 혹시나 죽음을 발견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결국 그것을 보게 한 것이다. 눈 뜬 채로 죽은 갓 태어난 생명체. 너무 놀라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해달 같았다. 이렇다. 세상은 내게 뜨겁고 생명력 가득한 볕을 다시 내어주고는, 옮기는 발자국 하나에 갓 태어난 동물의 사체를 보게 한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고로 네가 살아있다는 것 또한 기억하라. 떠나기 전 당부 같았다. 기억하라. 




카드놀이


     쿠바에서 산책하던 중, 창가에 혼자 앉아 카드놀이를 하는 아주머니를 본 적이 있다. 그녀는 카드를 일정한 간격으로 한 장씩 놓고 있었다. 나에게는 수수께끼처럼 보였지만 그녀만의 법칙이 있었을 거다. 다음 날에도 그녀는 같은 자리에서 똑같이 카드를 만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방해가 될 것 같아 산책을 계속했다. 어릴 적 할머니 집에서 화투로 당신의 한 해 운세를 보던 아빠 생각이 났다. 어린 내 눈에 이리저리 카드를 배열해 점괘를 읽는 것이 신기하게만 보였었다.  

     78장을 모두 뒤집은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삶은 내가 나를 상대로 하는 카드놀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것들이 그려져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여러 번 뒤섞으며 예상하고, 뒤집어 앞면을 보고, 순서를 바꿔서 연결 짓기도 하는 것. 사실 어느 면이 앞면인지, 뒷면인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기에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는 여러 장의 도화지일지도. 


     뜨거운 감자튀김과 커피를 사서 터미널로 향했다. 아름다운 감귤색 빛이 터미널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동해에 도착했던 첫날과는 다른 빛이었다. 이 빛은 한 챕터를 마무리 짓는 그런 빛이다. 모든 것을 안아주고, 저녁 식사가 준비되기 전까지 낮잠을 재워줄 그런 빛이었다. 눈이 부셨다.




손과 손


     다시, 다시. 내게서 빠져나가는 것들을 느낀다. 어느덧 반 이상이 빠져나간 것 같다. “나를 구성하던 것의 반 이상이 사라져서” 내가 나라고 말하기에 애석한 상황을 상상해본다. 도대체 빠져나간 것들은 무엇인가? 시간? 기억? 어떤 욕망? 나는 문득 모래시계를 떠올린다. 나는 78장의 카드, 그만큼의 모래를 가진 사람이다. 그것들은 여전히 나에게 있고, 단지 방향을 바꿀 시간이 된 것일 뿐이라고. 내게서 빠져나간 것들은 저 아래,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곳에 깨끗하게 쌓여있다가, 어느 순간 고운 색으로 다시 내게 흘러올 것이다. 


     편평해진 상태로 잠깐 멈춘다. 내 두 볼과 팔꿈치에 닿는 물을 느낀다. 나는 손을 뻗어 물살을 가른다. 모래알이 고이 쌓이는 소리가 들린다.  

     어렴풋 깨고 나서야 그것이 잠이었다는 것을 안다. 다가올 봄을 위한 겨울잠 같은 것. 앞으로도 몇 번이고 표류의 시간을 겪으리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것은 상실, 지체, 머뭇거림이 아닌, 방향을 바꿔 내가 나를 새로이 맞이하는 시간임을 깨달았다. ‘나’라는 모래시계의 모양은 계속 변할 것이고, 언젠가 그 형태마저 부서져 모래들이 자유로운 모양으로 흩날리리라는 것도.


     나는 내 어깨 위로 떨어지는 고운 모래알을 느끼며 카드 한 장 한 장을 천천히 다시 섞는다.





아주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생각

연초에 떠오른 단상

무력감을 느끼던 중 떠난 10월의 여행지에서

내게 찾아온 것들을 썼습니다.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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