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음성이 아니라 ‘향’이었다면 어땠을까. “태초에 향이 있었다.” 나는 아주 가늘게, 흐늘거리며, 흐늘거리다 굴러 앉는, 향의 형태를 떠올린다. 보이지않는 그 줄기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점’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점’에서 뿔이 솟아난다. 뿔이 열리며 둥근 형태로 확장한다. 확장하며 색으로 물든다. ‘향’은 형태를 그려내고 그제야 목소리를 가진다. 향은 말한다. “너는 여기서 태어났다.”
향 그리고 연꽃
내가 아직 초등학생일 때, 아빠는 몸이 좋지 않아 일을 쉬고 있었다. 한가로운 오후에는 아빠랑 종종 뒷산에 올랐다. 대부분은 산책하듯, 어떤 날은 돗자리와 과자, 스케치북을 들고 소풍 가듯 올랐다. 산 중턱 너른 곳에 펼친 돗자리 위에서 아빠는 낮잠을 잤고 나는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렸다. 동생이랑 함께 가는 날은 조금 더 소란스러웠다. 반반한 돌을 찾아 비석치기를 하고, 이파리가 여럿 붙은 풀을 뜯어서 짝수인지 홀수인지 맞혀보는 놀이를 했다.
산에는 ‘자비정사’라는 작은 절이 있었다. 그 절이 우리의 목적지이자 반환점이었다. 큼직한 돌계단을 얼마만큼 오르면 작은 절이 모습을 드러낸다. 도착하면 기분 좋은 보상으로 물부터 마셨던 기억이 난다.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물이 알록달록한 바가지에 졸졸 담겼다. 나는 물을 꿀떡꿀떡 마시며, 주변 바윗돌 위에 앉아있는 작은 불상과 동자 스님 인형들을 살폈다.
절은 작았지만, 그보다 더 작은 나를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벽에는 구름을 타고 다니는 할아버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몽둥이로 벌을 주는 요괴가 그려져 있었다. 다음날 다시 오면 그들의 표정과 자세가 변해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던 것 같다.
신발을 벗어 큰 디딤돌 위로 오른다. 쇠로 된 둥근 문고리를 잡고 나무 문을 힘껏 열면 차분한 한기와 함께 ‘향’이 나를 덮친다. 거대한 ‘향 구름’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릴 것 같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긴다. 짙은 갈색의 두꺼운 나무 바닥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향을 헤집으며 날아다녔다.
아빠는 지폐를 꺼내 함에 넣었다. 나는 자격 미달의 손님인 것만 같은 기분으로 쭈뼛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다 어떤 눈빛을 발견한다. ㅡ이 눈빛은 훗날 ‘영원을 응시하는 눈빛’이라 표현하게 될 그것의 시초가 된다.ㅡ가느다란 손가락. 어딘가를 가리키는 비현실적인 그 손가락.
아빠 따라 절을 한다. 손을 어떻게 포개는지, 언제 숙이고 언제 일어나야 할지 항상 몰랐다. 곁눈질로 아빠를 흉내 내며 바닥에 얼굴을 묻는다. 굽어진 내 모습에 스스로 어색해질 즘, 향이 밴 나무 바닥에 콧잔등이 닿았다. ‘그 눈빛’과 손가락의 잔상이 ‘향’ 때문에 달아난다. 그렇게 아찔한 세계로 빠진다. 나에게 ‘향’의 시작은 이 두꺼운 나무 바닥에서부터였다. 그래서인지 향을 맡을 때마다 삐걱대는 나무 바닥의 소리가 함께 들린다.
매번 걸어 올라가던 절을 특별히 차를 타고 갈 때가 있었는데, 바로 석가탄신일이다. 절에서 마련한 회색 봉고가 동네에서부터 부지런히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항상 조용하던 절이 축제 분위기에 떠들썩해진 것을 보는 것은 새롭고 즐거웠다. 하얗고 포근한 백설기도 받았다. 한쪽에는 아무렇게나 앉아 절밥을 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빠는 나를 어떤 것 앞으로 데려갔다. 사람들이 서 있던 그곳에는 꽃에 둘러싸인 아기 부처가 있었다. 마치 공중에 솟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빠는 물을 3번 나눠 아기 부처 머리 위로 붓는 거라 일러줬다. 내 기억 속 그 형체는 이제 조금 흐릿하지만, 물이 아기 부처에게 닿을 때 내가 느꼈던,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차가운 물의 촉감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물줄기의 궤적을 눈으로 따라가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다시 태어난 기분을 느낀다.
이른 새벽, 연잎에 맺힌 촘촘한 이슬들은 보석처럼 빛난다. 확장하다가 굴러떨어진 물방울이 연잎 위에 선명한 흔적을 남기며 유영한다. 어디에도 때는 묻지 않는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농업용 장화를 신고 연밭을 걸어본다. 마치 밀림 숲을 탐험하듯, 내 키보다 높은 연잎들이 만들어낸 커다란 그늘을 조금씩 무너뜨리며, 물속에서 힘겹게 발을 옮긴다. 빼곡했던 개구리밥들이 내가 지나간 모양으로 흩어진다. 널따란 연잎 위에는 연꽃잎과 수술들이, 그 과정을 상상하기 힘든 모양으로 낙하해 누워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향을 맡는다. 하얀 연꽃과 자주색 연꽃이 서로 다른 향을 뿜으며 흔들린다. 하얀 연꽃에는 아카시아와 닮은 향이 나는데, 저 혼자 몇 계절은 더 보낸 듯 진하고 깊다. 이슬과 향 위에서 수많은 해가 뜨고 진다. 연꽃들은 저마다의 색깔로 빛을 가두고 또 통과시킨다.
연농사를 짓는 친구 덕에 사계절의 연을 가까이서 보고 있다. 매번 새로운 마음으로 연꽃 앞에 서리라는 것을 어릴 적엔 몰랐을 것이다. 마주 봄의 경험들이 켜켜이 쌓이며, 나는 여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내 몸의 어떤 ‘느낌들의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좋은 것을 볼 때, 감격스러워 그것을 더 잘 느끼려고 할 때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숙이는 이유. 조용히 내 어깨 위에서 찰랑이는 물줄기를 상상하던 버릇은 바로, 어릴 적 아기 부처 위에 내가 부은 물에서부터였다. 어떤 눈빛 아래 향 구름과 나무 바닥, 연꽃 위의 아기 부처 그리고 그 위에서 흐르는 물. 연꽃 앞에서, 여느 꽃을 봤을 때와는 다른 마음이 되었던 건 어린 시절 새겨진 맑은 자국 때문이었다. 고요히 흔들리는 연꽃, 연잎 위를 구르는 물방울을 보며 나는, 내 몸에 새겨진 보이지않는 자국들을 나도 모르게 형상화하고 있었다.
나에게 향은 ‘그 눈빛’에서, 나무 바닥에서 태어났다.
목덜미를 흐르는 물줄기는 연꽃에서 태어났다. 연꽃은 향에서 태어났다.
향은 그 눈빛에서, 나무 바닥에서 태어났다.
신비한 손가락을 가진, 영원을 응시하는 그 눈빛에서.
그 눈빛은 향을 품고… 나를 품고… 연꽃을 품고… 물줄기를 품고… 다시…
2020. 12
글.사진 배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