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결국 아빠와 비슷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
"여자는 결국 자신의 아빠와 비슷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
결혼을 선택을 했을 때 파국이라는 결말만 존재한다면 결혼을 하지 않는 선택지를 고르면 된다. 실제로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나와 같은 이유는 아니더라도 각자의 이유로 비혼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비혼이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왜냐하면 평범한 가족을 꾸려서 사는 게 내 오랜 꿈이었기 때문이다. 근면 성실한 남편과 아이를 낳고 그 아이에게 사랑을 듬뿍 주는 삶. 나는 커리어 적인 욕심보다는 그런 삶을 더 욕망했다.
그래서였을까. 아빠와 똑같은 남자와 결혼하게 될 거라는 말은 끔찍한 저주처럼 느껴졌다. 왜냐하면 나에게 아빠라는 존재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이기적이며, 상습적으로 외도를 일삼는 책임감 없는 남자로 각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그런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게 될 운명이라니 이보다 더 절망적인 꼬리표가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나는 항상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세뇌했던 거 같다. '아빠랑 정반대 되는 사람을 만나야 해. 그래야지만 내가 꿈꾸는 화목한 가정을 만들 수 있어. 절대 아빠 같은 남자는 안돼.'
완벽한 사람을 찾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안정적인 직장에 책임감 있고 외도를 하지 않을 남자를 찾고 있었을 뿐이다. 결국 나는 내 기준에 맞는 훌륭한 배우자 감을 찾는 것에 성공했고 그게 바로 내 전남편이었다.
아빠와 반대의 성향을 가진 남자와 결혼에 성공한 나는 이제는 저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인간은 비슷한 인간관계를 반복한다. 그 관계가 비록 파괴적이더라도."
아빠와 비슷한 인간 군상을 혐오했던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와 가장 깊은 관계를 맺었던,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존재인 엄마와 비슷한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엄마와 나의 관계가 내 인생에 얼마나 해로웠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상태로.
내 부모의 싸움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이다. 둘은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소리 지르며 싸웠다. 나와 동생이 듣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아니 오히려 들으라는 듯이. 나는 한 인간의 심연을 어린 시절부터 경험했다. 그래서 사람이 무서웠다. 나는 항상 그 소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기에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몰랐다. 그저 가만히 이불을 덮어쓰고 문밖에서 펼쳐지는 지옥이 끝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항상 싸움을 거는 쪽은 엄마였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던 엄마가 아빠에게 분노할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별난 시어머니, 아빠의 경제적 무능력 그리고 엄마를 한 인간으로서 가장 크게 무너지게 만들었던 외도 문제. 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고 그 강도는 서서히 점점 더 심해졌다. 나중에는 결국 육탄전까지 벌어졌는데 나와 동생은 부모가 밑바닥까지 떨어져서 싸우는 그 모습을 마치 연극처럼,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내가 10대가 되고 사춘기가 시작되자 둘의 부부싸움에 나와 동생까지 같이 합류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싸움이 끝난 뒤에는 엄마는 항상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크게 울었고, 엄마는 딸에게 두 사람이 왜 싸울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항상 악역은 아빠의 것이었다. 엄마에게 있어서 우리 가족 모든 불행의 원인은 아빠였다.
"OO아, 엄마가 이혼해도 될까. 이제 도저히 아빠랑 정말 못 살겠어. 엄마가 이혼해도 너는 엄마 이해해 줄 거지?"
두 사람이 싸움이 끝나면 언제나 매일, 한 번도 빠짐없이, 엄마가 나에게 울면서 했단 말이다. 부모라는 성인이 미성년자인 자녀에게 이혼을 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다. 엄마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어린 나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가엾은 엄마가 하루빨리 아빠 같은 못난 남자랑 이혼해서 새 삶을 시작했으면 하고 간절하게 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내 염원은 지금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엄마의 이혼 보다 나의 이혼이 더 빨랐으니 말이다. 아무리 어렸다고 하지만 달라지는 것 없이 항상 똑같이 반복되는 엄마의 행동과 말에 나는 한 번씩 의문을 가졌고 가끔은 답답한 마음에 엄마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내가 엄마에게 객관적인 조언을 하면 항상 되돌아오는 말은 이랬다.
"너도 이기적인 거 네 아빠랑 똑같다"
엄마는 자신의 딸에게 방금 전까지 죽일 듯이 싸우던 남자랑 똑같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엄마가 그건 칭찬이라고 했다. "여자는 자고로 네 아빠처럼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며 내가 아빠와 성격이 똑같은 게 다행이라고 했다.
시간이 흘러도 지독한 가난과 부모의 싸움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결혼을 했다. 결혼으로 도피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했던가. 하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있었다. 하지만 그 유효기간은 딱 1년이었다. 하지만 그 낙원은 내 손으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남편이 만들어 준 낙원이었고, 언제든지 남편이 마음만 변하면 무너질 수 있는 낙원이었다.
내가 원했던 남자와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두려워하던 부모가 싸우는 모습을 내 딸에게 똑같이 보여주게 되었다. 전 남편과 나의 싸움 패턴도 부모의 그것과 비슷했다. 단지 다른 점은 비난을 받는 쪽이 남편이 아니라 나였다는 것이다. 남편에게 생기는 모든 문제는 나로 인해서 생기는 것들이었다. 남편의 눈에 비친 나는 게으르고 무능력하고 책임감 없고 나는 내가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아빠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아 그럼 나만 달라지면 된다. 내가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남편도 나에게 싸움을 걸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불행의 원인이 항상 아빠의 어떠한 행동 탓이라고 했다. 엄마가 아빠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원인은 같은 것이었다. 엄마를 불편하게 하는 아빠의 어떠한 <행동>. 그래서 나는 남편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했다. 그러면 남편이 만족해할 것이고, 내가 원하는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원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달라지는 건 없었고 얼마 못 가 다른 불만이 나타났다. 남편은 꾸준히 직장을 나가는 성실한 사람이고 책임감이 있고 외도도 하지 않는 [정상적인 사람] 이였기에 아빠와 똑같은 성격의 [부족한] 나는 남편의 말을 따라야 잘 산다고 생각했다.
내 부모가 싸우는 이유는 이기적이고 게으른 아빠 때문이고 나는 아빠와 성격이 똑같고 그러므로 희생자는 엄마와 내 전 남편 같은 사람이다. 내가 지금 까지 살아온 인생의 공식은 그게 정답이였다. 그러니 부모님과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내가 남편의 말을 잘 듣는 방법 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버텼다. 나에게는 엄마가 절대적인 존재였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엄마에게 거짓말 조차 해본 적 없다. 하지만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드디어 나는 진실을 깨달아 버렸다. 엄마는 우리 가족의 숭고한 희생자가 아니라 그녀 역시 자신의 남편처럼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진짜 숭고한 희생자 였다면 자신보다 한참 어린 딸을 그렇게 감정 쓰레기 통으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엄마에게 제일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람은 자신이였다.
엄마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이 정도 살았으면 내 인생에 생긴 일들의 결과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고 싶다. 내가 전남편의 정서적 학대를 10년 가까이 버텨내면서 살아낸 이유를 찾고 싶다. 나는 우리 부모의 영향을 적게 받고 산다고 생각했다. 나는 부모님이랑 다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라는 지금까지 내 인생에 너무나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제는 그 굴레를 끊고 벗어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