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아프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5월에서 6월로 넘어가는 조금 후끈해지는 여름의 시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날씨는 더워지고,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의 확산으로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진료를 보던 시기였다. 마스크 안의 갑갑한 공기는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 여전히 환자들을 눈과 눈으로만 마주해야 했던 시기, 표정을 볼 수 없었던 시기였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 그녀는 국가검진을 받기 위해서 병원에 내원했었고 나는 그녀를 문진하기 위해 만났다. 차트를 보니 만 60세인 그녀는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을 진단받은 상태였다. 그녀의 우울증 선별검사 결과를 보고 고개를 들어 질문했던 게 그 대화의 시작이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우울 척도가 정상보다 높은 사람들에게 내가 종종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받으면 눈물부터 흘리는 분들도 종종 있으시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는 분들도 계시고, 입을 다물어버리는 분들도 계시다. 그녀는 내 질문에 조용히 대답해 주었다.
그녀의 사정은 이러했다.
남편, 아들과 함께 살던 그녀는 가정폭력 상황에 있었다고 했다. 남편은 술을 많이 마셨고 상습적인 폭행을 자행했다. 그녀는 아들을 생각하면서 버텼다고 했다. 교회를 다녔다는 그녀는 새벽마다 기도를 했고 매일매일 힘든 싸움을 했지만, 결국은 참고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아들을 데리고 멀리 도망쳐 나왔다. 하지만, 남편은 결국 그녀를 찾아냈고 또 폭행을 했다. 이사를 가면 결국 거주지를 찾아내서 그녀를 때리기를 반복했단다. 결국 남편은 아들을 빼앗아서 가버렸고 그녀는 남편의 폭행이 무서워서 주민등록말소 상태로 숨은 듯 살았다고 했다.
아들도 성인이 되고 그녀는 간헐적으로 아들을 만났지만,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는 주민등록 없는 상태로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그러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주민등록을 다시 하였는데, 그게 바로 몇 개월 전이었다고 했다. 주민등록증이 없으니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약도 처방받아먹은 적이 없었고, 최근에야 비로소 국가검진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민등록을 하고 나서 처음 방문한 병원에서 검사를 한 일이 있었고 그때 처음으로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약물치료 중이라 했다.
20여 분 동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이야기는 드라마나 영화보다 더 극적이라 현실감을 잃게 만든다. 같은 시간,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도무지 한 번에 납득이 되지 않아서 먹먹한 가슴으로, 눈물이 고인 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아들 이야기를 할 때만 약간 눈물이 고였을 뿐 목소리 떨림 없이 이야기를 했었다.
어떻게 견디셨어요...
어떤 질환들은 건강을 돌볼 상황이 안돼서 앞만 보고 달렸던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때, 담담하게 지난날들을 이야기해 주는 그 단단한 목소리에 안심이 되었다. 삶을 살며 예상치 못하게 닥친 일들에 온몸이 떨리기도 하고 흔들거렸던 나에겐 굳건히 선 것 같은 그녀의 눈웃음이 좋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모른다.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보이던 주름진 눈웃음과 우뚝 선 나무 한 그루 같은 목소리,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만 남았다. 이후로 난 그녀를 더 이상 만나지는 못했다. 아마도 어딘가에서 또 묵묵하게 살아가고 계시겠지,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건강도 잘 챙기고 계시겠지 생각만 할 뿐이다.
나는 그녀를 '잊지 못할 환자'라고 부른다. 그녀를 생각하면 내 앞의 문제들이 조금 더 단순하게 보인다. 그녀 앞에 선 나는 아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단순히 가엾은 인생을 산 여인으로 기억되지 않고, 모진 바람 속에도 꿋꿋하게 서 있는 아름답고 풍성한 나무같이 기억에 남아주어 참 고맙다. 다시 만날 기회가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기에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해주기 전에는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마음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
부디,
당신이 더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녀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어떤 질병도 그녀를 피해 갔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그녀에게도 꽃 같은 향기롭고 아름다운 날들이 매일 이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