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첫 진단일의 기억
평생 그 어떤 질병에도 걸리지 않고 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나이 들면 어떤 질병 하나쯤은 가지고 살게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간다. 언제 그 질환을 진단받을지는 모르지만, 아마 '언젠가는'이라는 생각으로. 남의 일 같던 질병을 진단받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써보고자 한다.
그녀는 50대 초반이었다. 병원을 자주 오가던 사람도 아니었고 잔병치레도 별로 없이 꽤나 건강하게 살았다고 했다.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당 수치가 높다며 나에게 확인을 받기 위해서 내원하였다. 공복 상태를 확인하고 혈당과 당화 혈색소를 포함한 혈액검사를 하였다. 며칠 후 결과를 듣기 위해 내원한 그녀에게 나는 당뇨 진단을 하였다.
진료 중에 한참 동안 내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그녀는 주저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나에게 제대로 시선을 맞추지도 못했다. 사실 당뇨, 고혈압, 이상지질혈증 등의 만성질환은 내가 흔하게 진료를 하는 질환들이고 치료하지 않고 오래 두면 생기는 문제들에 대해 우려되는 부분들이 많아 적극 치료를 권하는 편이다. 생활습관 변화를 우선적으로 권하지만, 생활습관 변화만으로 원하는 만큼 수치를 정상화시키지 못하는 분들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녀가 촉촉한 눈빛으로 나에게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다시 검사해 보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그러자고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진료는 끝났다.
며칠간 그녀의 표정이 계속 밟혔다. 그 표정의 흔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보려 했다. 몇 달 전, 병원 검진에서 LDL-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걸 확인 한순간의 내 마음이 떠올랐다. 검사할 때마다 늘 정상 범위 내에 결과가 있었기 때문에 붉은색, 파란색의 증감 표시조차 없는 결과지를 받았었는데, 빨간 삼각형의 증가 표시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젠 내 몸이 뭔가 정상이 아니라는 순간적인 두려움이었다. 당시 나는 차라리 결과를 못 본 척하고 싶었다.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겠구나, 다시 검사해서 확인해 봐야겠구나 등등 생각을 하면서 아무런 만성질환 없이 지내던 사람이 처음으로 약을 복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느껴야 하는 당황스러움을 경험했다.
내가 얼굴을 익히고 사는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는 환자분들은 주로 만성질환을 가진 분들이다. 약을 지속적으로 복용해야 하기 때문에 2-3개월마다 방문하시기도 하고, 또 별다른 변화들이 없기에 진료 시간에 여러 가지 질문도 하고 그분들의 삶의 소소한 변화들에 대해 듣기도 한다. 오랫동안 약을 드시는 분들은 약 복용에 익숙해져 있고 약 처방에 대해 저항감이 적으신 편이다. 하지만 만성질환을 처음 진단받아서 약을 드시기 시작하실 때는 대부분 심리적 저항을 경험하시게 된다.
이 약을 먹기 시작하면
평생 먹어야 한다면서요?
정말 많이 듣는 질문이다. 만성질환을 처음 진단하면, 이 질문에 대해 반드시 솔직하게 설명을 드려야 한다. 약을 중단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는 것,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생활습관의 많은 변화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활습관 변화에 대해 노력하면서 수치가 괜찮다는 걸 확인하면 한동안은 약 없이 지내실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대부분 수치가 높았던 분들은 추후 다시 높아질 경우가 많아 다시 약을 복용하시게 된다는 것도 덧붙여 설명드린다.
급성질환의 진단은 치료하면 나으리라는, 전과 같이 건강해질 거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크게 심각하지 않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급성질환이 중증으로 진행될 가능성보다 자신이 앓고 난 후에 회복될 거라는 긍정적인 확신을 가진다. 아픈 게 힘들어도 단기간이기에 '아프다'라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만성질환은 받아들이는 방법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내가 '더 이상 건강하지 않다'라는 충격을 경험하는 것 같다. 당장 느껴지는 통증도 없어서 약 먹는다고 호전되는 느낌조차 없다. 지금 잠시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나는 건강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만성질환은 약물복용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몸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도록 관리해야 하는 질환이다. 나는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건강하지 않은 상태인 것이 아니라, 건강한 상태이도록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시도록 말씀드린다. 10년을 비타민 보충제를 드시면서 지내셔도 불편이 없으셨던 것처럼, 앞으로도 수치를 정상으로 늘 유지하도록 약을 드시는 거라고 설명을 드린다. 비타민 드시듯이 편하게 드시라고, 다만 더욱 건강한 삶을 위해서 식사도 잘 선택하여 드시고, 운동도 꾸준히 하시도록 격려한다. 이러한 내 말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벼워지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첫 당뇨 진단을 받았던 그녀는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해도 잘 치료하면서 살아가는 게 더 좋은 선택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나이 들면서 하나 둘 생기는 내 몸의 질환들은 젊은 날에 치열하게 나를 위해 일했던 내 몸들이 이젠 돌봄 받기를 원한다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더 아끼고 사랑하고 잘 돌보아주라고 주는 사인 말이다. 우리에게 어떤 질환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지만, 어떤 모양으로 우리의 몸이 신호를 보낼지라도 우리가 할 일은 불편한 수치들이 정상인 상태로 잘 유지하는 것이다. 그 이상의 심각한 질환으로 아파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이 만성질환 관리의 중요한 의미이므로.
건강한 삶은
몸에 아무 이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이상이 있는 상태를 인정하고
최선의 기능을 하도록 잘 관리하는 삶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