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책을 읽다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_메리 비어드

로마의 성장과 절정기까지의 역사 속으로

by Jianna Kwon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_메리 비어드 저/다른


SPQR

Senatus PolulusQue Romanus
'로마의 원로원과 민중'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두꺼운 책을 로마로 떠나기 전에 읽은 것은 로마의 역사를 더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이 책 속에 방대한 로마사에 대한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담겨 있을 것 같은 직감 때문이었다. 읽고 싶은 책이 워낙 많았고, 이 책을 단숨에 읽을 의지가 부족하여 꼬박 일주일간 밤마다 한두 시간씩 읽었다. 이 책을 읽고 미처 리뷰를 남길 시간도 없이 여행 가방을 싸고 떠나게 되었는데, 이 책을 읽고 가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에 도착한 후로 'SPQR'을 마주할 때마다 이 책을 떠올리고 다시 로마의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이 '바로 로마'라고 알려주는 사인이었다.



로마에서 만난 SPQR 사인들


이 책은 로마사의 전부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로마가 어떻게 성장했고 어떻게 오래 그 지위를 유지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로마의 쇠퇴 및 쇠망사가 궁금하다면 다른 책을 봐야 한다.) '어떻게 이탈리아 중부의 작고 평범한 도시인 로마가 고대 지중해 세계의 다른 어느 도시보다 큰 도시로 성장해 그 거대한 로마제국을 지배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로마인들에게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제1장에서 저자 메리 비어드는 키케로의 전성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녀는 '기원전 63년'을 매우 의미 있는 해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해는 키케로의 이력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된 시점이었다. 정치적 조상을 두지 못한 '신인'이었던 키케로가 집정 관직 선거에서 카탈리나를 이긴 때였다. 그의 기원전 63년 11월 8일의 연설은 지금도 유명한 인용문으로 알려져 있다.



Quo usque tandem
abutere Catilina,
parientia nostra?

카탈리나여,
그대는 얼마나 더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할 텐가?



키케로의 전성기였던 당시가 중요한 이유는, 기원전 58년 그가 추방당하고 기원전 43년에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 시기까지가 로마 공화정이 파국에 이르고 로마제국이 시작되는 변곡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제2장부터 로마의 건국 시조인 로물루스와 쌍둥이 형제의 레무스의 젖먹이는 늑대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212년 황제 카라칼라가 로마 제국의 자유민은 어디에 살든 모두 로마 시민이라 선포했던 제국의 절정기에 이르는 로마 1000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로마의 건국 시조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이야기에는 살인부터 강간, 유기를 거쳐 범죄자이자 도주자였던 로마의 첫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영웅답지 못한 요소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세워진 로마 왕정은 식스투스 타르퀴니우스가 루크레티아를 위협하고 겁탈하여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으로 인해 무너졌다. 이로써 왕들은 축출되고 기원전 6세기 말에 자유로운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당시 집정관 선출의 핵심적 원칙이 있었으니, 그것은 (1) 온전한 인민의 투표로 선출되어야 한다는 것과 (2) 1년 임기를 완료하고 다음 인계할 사람을 선출하도록 이끄는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 그리고 (3) 한 쌍으로 직책을 분담한다는 것이었다. 이 로마 공화정을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있었으니, 그것은 '자유' 곧 리베르타스(libertas)였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에도 몇 차례의 개혁이 있었다. 기원전 494년에 일어난 최초의 개혁은 평민들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기 위해 '호민관'으로 알려진 공적 대표자들을 임명하는 것이었고, 기원전 367년에는 두 집정관 가운데 하나는 반드시 평민이어야 한다고 결정한 혁명적인 일이 있었다. 로마 공화정 시기에 큰 전쟁도 있었으니 그 유명한 포에니 전쟁이다. 포에니전쟁은 파괴적이었고 로마는 승리했으나 당시 로마인들은 해외의 영토를 체계적으로 합병하려 하거나 표준적인 지배의 메커니즘을 부과하지는 않았다. 전쟁 포로들과 노예들은 머지않아 해방되어 새로운 로마 시민이 되었고, 로마인과 외부인 사이의 구분은 점점 더 흐려졌으며, 동시에 로마인들이 여행객, 상인, 모험가로써 해외로 쏟아져 나갔다. 기원전 146년에는 유혈이 낭자한 폭력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로마는 군사적 성공의 절정기를 맞게 되었고, 이후로 로마의 문학, 미술, 문화의 절정기도 오게 되지만, 이러한 로마의 눈부신 업적 뒤에는 점진적인 정치적 도덕적 타락이 있었다. 극소수의 개인이 국가를 지배하는 로마는 평화로운 정치를 하는 기능을 잃었다. 지도층에서 개혁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각자의 개인적인 이기심으로 인해 많은 반대에 부딪혀 실행되지 못한 것이 더 많았다. 또 다른 문제도 발생했으니, 로마인들이 흘러들어오는 수많은 외부인과 쉽게 로마인이 되어버리는 현실 속에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전쟁으로 온 힘을 쏟던 로마는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대가와 손실을 감수해야 했지만, 로마에 맞서 무기를 들지 않았거나 무기를 내려놓는 이탈리아인들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래서 '로마인'은 로마와 고향 도시의 이중 시민권과 이중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원칙이 규범이 되어 버렸다.

그럼, 이제 다시 지배 계급의 부패와 무능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런 문제는 편협한 엘리트주의와 외부 재능자를 인정 안 하던 당시의 지배계급의 폐쇄성에서 기인한다. 이때 등장한 사람들이 바로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두 사람은 원정에 나가 승리를 거두었고 로마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세계 정복에 대한 로마의 야심을 보여주었던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1년 개선식을 하며 로마로 돌아왔고, 그는 로마의 첫 황제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위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폼페이우스보다 늦게 로마로 들어왔으나, 더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었으니, 카이사르였다. 그는 갈리아에서 10년에 걸친 전쟁을 끝내고, 기원전 49년 1월 10일 '루비콘 강을 건너서' 이탈리아도 돌아오게 된다. 이때 "주사위를 던져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고 한다. 이후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의 내전이 있었고, 당시 카이사르에게 잘 보이려 했던 이집트는 폼페이우스를 살해하게 된다. 이후 카이사르는 강력한 로마공화정의 정치가로 우뚝 선다. 하지만, 그는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에게 불만을 품은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살해되기에 이른다.

기원전 27년에,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존엄한 자')가 고대 로마의 첫 황제가 된다. 그는 새로운 체제의 건국 시조가 되었고, 50년 이상 로마를 지배했다. 그는 자신을 황제가 아니라 '프린켑스', 곧 '제1시민'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그는 로마 세계에 자신의 초상이 넘쳐나게 하였는데,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초상화로 많이 알려지게 된 인물이 되었다. 시민과 동등한 위치이지만 첫 번째라는 의미의 '제1시민'의 의미는 변질되고 황제는 신의 지위까지 갖게 된다. 이는 유일신을 섬기는 그리스도 교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네로는 로마 대화재를 그리스도인들의 탓으로 돌리며 고문하고 박해하게 된다. 이후에 그리스도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신앙 철회의 기회를 주는 왕도 있었지만 그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처형, 고문, 심문, 박해를 당하는 기독교 수난의 역사가 남게 된다.

그렇다면, 로마 밖의 로마는 어땠을까? 속주의 총독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그들은 로마와 접촉하지 않고 작은 독재자로써 군림하였고, 속 주민들을 대상으로 온갖 종류의 일상적인 착취를 당연하게 여겼다고 한다. 로마 밖의 로마는 폐허가 되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평화라고 불렀다.

로마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사회적 정치적 갈등은 없었을까? 하지만 노골적인 반란이 더 자주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가? 실제로 작은 폭동들은 잦았다. 하지만 그것은 개혁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 식량공급을 수월하게 받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부자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상태라고 생각했고 가난을 피하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가난한 자들의 야심은 사회질서를 바꾸고 뒤집어엎는 데에 있지 않고, 부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들은 치열하게 개혁하는 대신, 부지런히 부를 얻는 데에 더 관심이 있었다.

212년 황제 카라칼라는 로마의 상속세 의무의 범위를 확장하고, 부족한 재원을 더욱 채우기 위하여 로마 제국의 자유민은 어디 살든 모두 로마 시민이라 칭하였다. 속주에서 로마 시민권을 얻는 것은 이제 그리 어렵지 않았다. 로마군에서 복무 기한을 마치거나, 지역 관료를 하거나, 특별한 봉사를 하기만 하면 되었다. 결국 이제 속주민들이 로마를 다스리는 상황이 된 것이다.




2018년 2월, 팔라티노 언덕에 올랐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바라본 포로 로마노


포로 로마노의 잔재들과 멀리 콜로세움이 보인다.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서 바라본 포로 로마노의 모습이 수만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2000여 년 전의 이야기가 내 앞에 있었다. 같은 장소에 수많은 역사의 흔적들이 흩어져 만났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또 한 명의 증인이 되어 서 있었다. 이 책의 이야기가 모두 생각나지는 않아도 필름이 빨리 돌아가는 것처럼 과거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빠르게 빠져나오는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 그리고는 과거와 현재가 분리된다. 그러다가 또다시 하나가 되는 듯했다.



Veni, vidi, vici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The Well-beloved
로마의 순간을 호흡하고 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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