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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nna Kwon Jun 01. 2018

스튜디오 콘크리트:장 줄리앙, lineage

썬과 함께한 파리 디자인 산책


스튜디오 콘크리트 (STUDIO CONCRETE)

서울 용산구 한남대로 162
매일 11:00AM-8:00PM
www.studio-ccrt.com


   기분전환이 필요한 날이었다. 어쩔 수 없이 웃게 해주는 무언가를 만나, 피식 웃어버리고 싶은 날이었다. 어이없고 황당하고 어쩌면 그보다 더 단순한 건 없을 것만 같은 무언가를 마주하고 서서 비교적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미소 짓고 돌아서고 싶은 날. 하필 그런 생각이 드는 날에 햇살도 좋았다. 하늘도 제법 파랬다. 도서관에 들러 책을 반납하고 꽤 많은 양의 책을 또 대출하고 나서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른 사람처럼 걸었다. 그렇게 한남동의 스튜디오 콘크리트로 향했다.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니까


   솔직히 스튜디오 콘크리트를 가고 싶었다기보다 장 줄리앙(Jean Jullien)의 그림을 보고 싶었다. 스튜디오 콘크리트가 유아인 갤러리 혹은 유아인 카페로 유명세를 탔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나는 유아인이 나오는 그 유명한 드라마도 아직 보지 못했고, 유아인이 나오는 영화는 한 편 본 것 같은데 그의 매력에 푹 빠져있지도 않다. 다만 스튜디오 콘크리트의 건물을 보면서 오래된 단독주택을 낡은 느낌 그대로 사용했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예술 감성 충만한 80-90년대생 멤버들이 아티스트 그룹을 형성하여 아지트로 삼은 그 공간이 궁금했다. 스튜디오 콘크리트는 갤러리와 샵, 카페가 복합된 종합 창작 스튜디오다. 전시가 있을 때에 미루고 미루다가 전시 종료 며칠 전에 겨우 턱걸이로 전시를 관람하는 나에게 스튜디오 콘크리트의 샵은 반쯤 비어있는 비이커처럼 보였지만, 작은 그 공간도 아늑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소녀 같은 느낌이었다. 진한 분홍의 여린 꽃잎들이 입구에서 흐트러지게 피어있는 탓도 있었을 것이고, 대부분의 관람객이 여성이었던 것도 이유일 것이고, 전시중인 장 줄리앙의 그림 속 색채가 경쾌하고 화사한 봄의 매력을 뿜어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름다움’보다 ‘유머’를


   장 줄리앙(Jean Jullien)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아이들 그림책으로는 <This is not a book>, <Imagine(한국어판 : 이매진)>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그림책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이번 개인전은 한국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한 지 2년 만에 열리는 두 번째 개인전으로 <lineage>라는 타이틀로 하는 전시이다. 가정을 꾸리고 최근 자녀를 낳아 아버지가 된 장 줄리앙은 가족에 대한 기억과 시간의 흐름 속 기록들을 코끼리를 사용하여 형상화하였다. 그 코끼리는 장 줄리앙 자신이라고 한다. 그는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이 자아를 발견하는 일종의 ‘유산’이라고 생각했고, 이렇게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을 통해, 사회를 통해 이루어짐을 표현하기 위해 ‘혈통’을 의미하는 <lineage>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전시에서는 멍하고 흐릿한 정신 상태로 그림을 봐도 어느 순간 눈이 반짝이며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유머코드를 경험할 수 있었다. 마냥 귀엽다고 하기엔 심플하고도 시크한 그림들은, 굳이 성실하고 진지하게 작품들을 바라보고자 하는 어떤 관람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굳어진 마음을 쥐락펴락하며 무장해제 시켜버릴 것이다. 파스텔톤의 부드럽고 따뜻한 배경컬러 위에 검은색 물감을 묻힌 붓으로 쓰윽 쓰윽 쉽게 그려나간 것 같은 그림들은 장 줄리앙이 비범함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또한 집안을 온통 그림 속 컬러들로 꾸미고 싶을 만큼 공간의 분위기를 색색깔의 풍선처럼 붕 띄워버리는 그의 색채들은 시선을 강탈했다. 소재는 어찌나 천진난만한지, 그림 속에서 존재감이 전혀 없는 새끼손가락만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이미지들은 구름이 되어 온 하늘을 덮고, 커다란 얼굴 옆에서 잔디를 깎는 기계로 주황색 풀 같은 것을 밀고 있는 사람이 제거하고 있는 것은 분명 주황색 잔디가 아니었다. 아빠의 어깨를 타고 올라 목마를 탄 아이의 엉덩이에서 시작해서 아빠의 등 뒤로 그려 내려온 얼룩은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쯤해서 나는 “어떡해”라고 하며 저 얼룩진 등판의 주인공일 것 같은 장 줄리앙을 안쓰러워했다. 눈을 반쯤 감은 한 사람이 코까지 잡아 올린 이불을 돌돌 말아 스스로 김말이가 되어버린 <roll>이라는 작품을 보면서는 사라 요코가 애정한 평생의 반려자로써의 이불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불만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그녀의 이불에 대한 애착, 그리고 바로 옆에서 맞장구치듯이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곁에 두고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이 이불이라고 했던 오리여인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어떤 작가의 글이 만나는 그림이었다. ‘그래, 가장 숨기 좋고, 가장 포근하며, 가장 빠져나오기 힘든 무언가는 어쩌면 이불일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며 푸힛 웃었다. 반전은 <SPACE>라는 작품 앞에서 있었다. 연신 웃음코드를 기대하던 나를 순간 울컥하게 한 그 작품은, 서로 꽤 멀고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상심해 있는 한 사람을 위로하는 길다란 팔을 가진 사람의 그림이었다. 서로 한 걸음씩만 앞으로 간다면, 저 팔이 저렇게 길지 않아도 될 텐데.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팔을 저렇게 늘린 저 사람은 행복할까? 과연.



그리고, 책 한 권


   얼음을 넣은 차가운 홍차를 한 잔 주문하고 빨대를 따라 쭈욱- 부드럽고 힘차게 올라오는 시원한 음료를 몸속으로 급하게 넘기며 옥상으로 올라갔다. 미술관에 혼자 올 때면, 책을 가지고 오자고 마음먹었다. 전시나 그 미술관에 어울리는 책 한 권 들고 가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책 속에 마음을 두되, 몸은 그 미술관 속에 있고 싶어서. 미술관 근처 카페에서도 좋다. 미술관에서 느꼈던 상쾌하고 청량한 기운들을 가지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쉬우니 책 한 권이면 나를 좀 더 그림과 함께 붙들어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썬과 함께한 파리 디자인 산책>을 들고 왔다. 장 줄리앙의 그림을 보면서 느꼈던 머릿속에서 불꽃이 터지는 것 같은 창의력 폭발적 실제들을 더 관람하고 싶어서였다. 과연 이 책을 선택하길 잘했다. 가볍게 읽히고 쉽게 넘어가는 페이지가 좋았고, 수많은 이미지들이 그려지고 상상이 되어 말풍선 아니, 상상풍선이 되는 순간들이 즐거웠다. 프랑스 애들은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게 달라서 디자인을 잘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부러웠다. ‘쟤는 한국 애니까 디자인은 뭐, 잘할 수밖에 없는 거 아냐? 보고 배운 게 그러니까.’라는 말 좀 들어보고 싶다는 순간적 열등감이랄까. 유머가 담긴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로 유명한 필립 스탁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유머가 없는 디자인은 인간적이지 않다.
‘아름다운’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디자인이든 아니든 오브제는 무엇보다도
서로 반대되는 것을 화해시키는
인간 지능의 모든 요인들을 포함한다.
유머가 없다는 것은 저속함을 뜻한다.


   가만 두면 한없이 진지해지고 사색하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나에게 예술과 문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현실 속에서 이성에 충실하느라 도무지 웃음코드가 뭐였는지조차 잊어버릴 것 같은 순간에, 우리를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지나치게 감성적인 세계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과 문학이기 때문이다. 건조하고 지치고 획일화된 박제 같은 일상 속에서, 짜증과 서글픔이 쏙 들어가게 해주며 춤추는 입꼬리를 선물해 주는 것이 유머를 가진 고급 예술과 고급 문학의 힘이다. 엉뚱한 것을 보려거든, 기왕이면 깜짝 놀라 펄쩍 뛸 무언가를 보시기를. 1초라도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해주고, 모든 시름을 잊게 해주며, 머릿속에 수천수만 개의 트리 전구가 일제히 켜지는 것 같은 환희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작품을 부디 만나기를, 우리 모두.



2018. 5. 31.

The Well-belo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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