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을 만지다
갤러리 아노브(Gallery ANOV)
서울 용산구 대사관로 34길 40
월요일 휴무
평일 12:00PM-01:00AM
주말(금,토) 12:00PM-03:00AM
TEL. 0507-1428-6606
‘쉼에 대한 고찰’
홍지은 작가의 개인전 포스터를 보는 순간, 마음이 사로잡혀버렸다. 창가의 하얀 패브릭을 보는 순간, 내 시선이 고정되게 한 고요함. 잠시 숨을 멈추게 한 사이, 온갖 더러운 것을 지워버릴 듯한 순결함. 한 장의 사진에 마음을 빼앗겨 달리듯 찾아간 곳, ‘갤러리 아노브(ANOV)’였다.
낯선 카페의 첫손님
‘갤러리 아노브(ANOV)’는 한남동에 있는 카페이자 바(bar)인 ‘아노브(ANOV)’의 4층에 있는 갤러리다. 3층과 루프탑은 카페와 바로, 그 사이에 있는 4층은 갤러리로 공간을 사용하고 있다. 미리 알고 찾아가지 않았다면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할 장소와 건물에 ‘아노브(ANOV)’가 있었다. 한남동에 갈 때 종종 지나던 길에서 조금 벗어난 낯선 길가에 있는 갈색 건물의 좁고 허름하고 오래된 계단을 올라가는 일은 설렘이어서, 이 계단을 몇 걸음만 더 올라가면 내가 찾던 그 장소에 도달한다는 기대감으로 충만했다. 그렇게 낯선 카페의 낯선 손님이 그날의 첫손님으로 인사를 했다.
새하얀, 흰, 순백의, Whitish
갤러리에 들어선 순간 내 마음을 하얗게 물들일 작품들을 가까이 만나기 전, 잠시 멈춰있기로 했다. 눈앞에 펼쳐진 부드러운 감각들이 하얀 빨래들을 햇빛에 널어둔 것처럼, 웨딩드레스를 눈앞에 두고 빛나는 눈망울로 바라볼 때처럼, 온몸을 둘러싸는 것 같았다.
하얀색을 좋아한다. 바람결에 살며시 들어 올려져 풍선처럼 부푼 투명한 하얀색 커튼의 끝자락을 좋아한다. 다리미로 빳빳하게 다려져 겹겹이 쌓아올려진 무명천의 깨끗함을 좋아한다. 파득거리며 가볍게 날아가는 하얀 나비를 좋아한다. “색깔을 선택하기 힘들 때는 그냥 하얀색으로 해.”라고 웃으며 말했던 친구의 편안한 하얀 미소를 좋아한다.
하양은,
아련한 꿈같은 하양,
아득한 근원의 하양,
아침에 눈뜰 때 부시는 빛 같은 하양,
추억 속에 드리워진 하양,
비밀을 품은 하양,
자유를 부르는 하양,
다른 색으로 물들 것을 감수하고도 모든 것을 품어주는 하양이다.
홍지은 작가의 작품을 보았다. 하얀 패브릭 주름의 흐름을 따라, 그 굴곡이 조용히 내 마음을 만지는 것 같았다. 모나지 않고 바람결을 고스란히 담은 것 같은 그 주름은 그 어떤 것도 밀어내지 않고 고스란히 담아줄 것만 같았다. 깊이 있는 포용의 힘을 가진 그녀의 작품 속에 푹 잠기는 듯 했다. 작품 속으로 흘러들어가 잠시 눈을 감고 쉬다가 나올 수 있었던 그 시간이 나에겐 깊고도 고요한 호흡과 같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를 생각했다. 순수에로의 열망으로 아이들을 지켜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겠다고 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이 순수 그 자체라면, 사춘기는 그 순수와 순수하지 않음의 내적인 갈등의 시기이고, 어른은 대부분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세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른이 된 나는 이미 잃어버린 순수함에 체념하며, 남아있는 순수함을 지키려고 몸부림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떤 날은 알아도 마음 편치 않은 어른들의 뒷이야기를 일부러 듣지 않으려고 자리를 뜨고 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직은 순수함의 존재량이 훨씬 풍부한 딸들에게 어른들은 마땅히 아는 이야기들을 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네모난 창을 통해 보이는 남산 위의 서울타워의 모습이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해주었다. 흘러나오는 음악과 하얀 벽 틈으로 들어오는 초록빛 싱그러움, 그리고 오밀조밀 모여 있는 건물들의 벽면과 지붕도 하나의 작품으로 갤러리 안에 들어와 있었다.
루프탑에서, 기분을 만지다
갤러리에서 나와 카페의 주문대 앞에 섰다. 병속에 예쁘게 담긴 꽃잎들을 보고 있자니 꽃잎차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들어 핑크색이 예쁘게 우러나올 것 같은 꽃잎을 골라 주문했다. 투명한 티팟에 담긴 분홍빛 찻물이 상큼하고도 고왔다.
홀로 올라가 마주한 루프탑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그레이톤의 소파와 초록 식물들, 난간을 장식한 꽃들과 테이블마다 놓인 핑크 팜파스로 황홀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햇살이 유난히 뜨거운 낮 시간이었지만, 루프탑의 그늘막 아래 있으니 따뜻한 기운만 남았다. 혼자 앉기엔 널찍한 소파에 기대어 앉아 얼음이 담긴 투명한 글라스에 잘 우러난 꽃잎차의 찻물을 옮겼다. 티팟에서 글라스로 분홍빛이 물들었다.
집에서 나올 때 카페에 가서 어떤 책을 읽을까 생각하다가, 얼마 전 사두었던 김은주 작가의 <기분을 만지다>를 가지고 나왔다. <1cm>으로 유명한 김은주 작가의 신작이다. 미국 사진작가 에밀리 블랑코의 사진과 함께여서 더 기대가 되는 책이었다. 이 책은 김은주 작가의 진실하고 사려 깊은 글과 에밀리 블랑코의 유쾌하고도 따뜻하며 생기로운 사진들이 잘 어우러진 멋진 콜라보레이션 작품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그녀의 글과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녀가 나를 공감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마음을 만지고, 내 기분을 무지개빛으로 물들이는, 아니 내가 좋아하는 그 어떤 색으로도 물들여줄 수 있는 책이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도 내 기분을 만지는 일이었다.
‘행복한 R석’이라는 제목의 글처럼, 대단한 무대장치는 없지만 아름다운 풍경과 편안한 기분은 있고, 앙코르 공연은 없지만 원할 때까지 머물러도 되는, 내가 발견하고 나만이 즐기는 일상의 R석에 오늘 나는 오랫동안 머물렀다. 점점 몸을 덥혀오는 따뜻한 해의 기운, 그럼에도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 시리지 않을 만큼 파란 하늘과 간헐적으로 귀에 들려오던 BGM의 잔잔한 음률이 나와 함께였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부탄의 왕이 된 4대왕은 국민총생산(GNP)보다 국민총행복(GNH)이 중요하다며 모든 정책을 그곳에 맞추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부탄은 ‘행복의 나라’로 알려졌다고. 나는 총행복량이 최대치에 이른 행복의 나라에 짧지만 확실한 여행을 다녀왔다. 한낮의 아노브(ANOV)로의 여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