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ys of seeing, 다른 방식으로 보기
[갤러리] 노블레스 컬렉션(Noblesse collection)
서울 강남구 선릉로162길 13 노블레스 빌딩 1F
매일 10:00AM-7:00PM
토, 일, 공휴일 휴무
TEL. 02) 540.5588
http://www.noblessecollection.com
주차가능
관람료 : 무료
얼마 전, SNS를 통해 햇살이 들어오는 녹음을 배경으로 놓인 유재연 작가의 <Moonlight Punch> 작품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평면이 벽으로부터 떨어져 세워지고 그런 평면들이 공간을 오롯이 채우고 있었다. 작품의 색과 선들은 모두 제각각인 것 같지만 그 온갖 다름의 어우러짐이 생동감과 생명력을 뿜어내는, 즐거움을 샘솟게 하는 작품이었다. 우연히 보게 된 하나의 이미지가 발걸음의 수고로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이끌림이 되기도 한다. 가자, 여긴 꼭 가야돼!
양(Quantity)보다 질(Quality)
‘노블레스 컬렉션’은 매거진 ‘노블레스’에서 운영하는 갤러리다. 일반적으로 흔하게 사기 어려운 물건들의 광고가 앞쪽의 페이지부터 분위기를 압도하는 매거진이지만, 지면에 실린 기사 내용의 충실성과 예술적 감각 및 선택의 탁월함을 경험했기에 ‘노블레스 컬렉션’에 대한 기대도 컸다. 살아 움직이며 환상 애니메이션처럼 각각의 작품들이 튀어 올라 이야기를 할 것 같은 유재연 작가의 작품에 대한 기대로 설레었다. ‘노블레스몰’과 한 공간을 나누어 사용하고 있는 ‘노블레스 갤러리’는 아담한 전시공간이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설 때 전면의 창을 채우고 있는 나무들의 푸르른 생기와 스며들어오는 햇살이 도심이 아닌 자연 속에 있는 신선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공간은 작게 느껴질지라도 그 안에 전시된 작품으로 인해 영감과 감동을 샤워하듯 공급받는 기분이었다.
일상과 환상세계가 공존하는 밤의 작품들
유재연 작가는 미국, 한국을 거쳐 현재는 영국에서 생활하며 작업 중이라고 한다. 어른이 되어 현재 경험하는 것들과 과거의 익숙한 어린 시절의 추억과 상상들이 특별히 그녀가 작업하는 시간인 밤에 부딪히고 스파크를 일으켰다. 밤의 사유들이 그녀의 작품의 시작점이 되어주었다. 각 개인의 상징적이고 이상적인 세계와 실제로 현실에서 경험하는 실재의 세계는 밤이 되어 충돌한다. 낮 동안엔 현실 속에서 부대끼다가 밤이 되어 고요해질 때가 되면 이 두 개의 세계는 조용히 각자의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 둘이 만날 때 작가의 머릿속에서, 감정 속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들이 이번 전시의 작품들로 표현되었다. 세계의 갈라진 틈과, 그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감들이 아이스러움와 어른다움의 대비로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였다가 어른이 된 누군가에게는 동심으로의 회귀를 경험하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조각회화(piece-painting) 시리즈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자작나무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작품들은 벽에 부착되어 있거나, 바닥으로부터 세워져서 기대어 설치되어 있었다. 그녀의 조각회화 작품들을 보며 행복은 색채에서 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녀가 선택한 색의 조화가 그 작품 앞에 서 있던 내 마음에 행복처럼 느껴졌다. 아이가 그린 것 같은 순수한 선, 물감이 적당히 묻어 부드럽게 그어진 굵은 붓터치, 그리고 따뜻한 나무의 느낌은 행복을 부풀렸다. 모든 것이 춤을 추고, 작품 속의 집도 춤을 추고, 바다도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녀가 그린 별과 달이 좋았다. 어린 시절 별그리기를 연습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하나, 둘, 셋, 넷, 다섯‘하며 내 손 안에 쏙 들어오는 딸의 손을 감싸 쥐고 별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기억도 났다. 그렇게 추억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그녀의 별과 달이 참 예뻤다. 그녀의 작품엔 자유로움이 있었다. 밤이 되면 모든 조각회화 작품들이 살아나 말을 하고 노래를 하며 둥둥 떠다닐 것 같은 상상을 하게 해준 작품들이었다. 수줍다가 명랑하다가, 깊은 심연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가볍게 날아오르는 모든 것을 동시에 펼쳐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어지럽지는 않았다. 수많은 모양과 색깔의 별이 하늘에 떠있는 것 같은 아름다운 마음을 남기고 지나가다가 툭, 툭,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을 흔적을 남기고 지나갈 뿐. 나는 거기서 가까이 두고 싶어 가슴앓이를 할 것 같은 작품을 만났다.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갤러리 밖으로 나와 조금 걸어내려 가다가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 가지고 갔던 책 한 권을 꺼냈다. 존 버거(John Berger)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이었다. 1972년, 즉 무려 40여 년 전에 쓰인 책이다. 당시 BBC에서 방영된 텔레비전 연속 강의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기존의 아카데믹한 보는 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질문을 새롭게 하도록 요청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미술이나 미술사에 대해 논의할 때 계급, 인종, 성차,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차원의 문제 등을 고려하는 신미술사학(New Art HIstory)과 시각문화연구(Visual culture studies)에 영향을 미쳤고, 그림 자체만이 아니라, 그림이 그려지게 된 상황과 환경 등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문제들을 고려하게 하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왜 어떤 작품은 명화이고 다른 작품은 명화가 아닌지, 왜 명화 속 여성의 누드는 관객인 나를 향하고 있거나 적어도 의식하고 있는지, 왜 권력과 명예, 부를 가진 사람들이 그림으로 자신의 공간을 채웠는지 등에 대한 궁금증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시작으로, 그림을 다양한 관점에서 보고 평가하는 자유로운 시선을 가진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미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필독서라는 이 책을 먼저 읽어보는 것이 시작으로 좋을 것 같다. 특히 보는 행위에서 성차(gender)와 직접 관련된 권력의 문제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제기한 것이 이 책이라 하니, 그림 속 여성들을 바라보는 예술가와 관객의 관점에 문제제기를 해왔던 사람이라면 이 책에 많이 공감할 것이다. 또한 광고에 대한 글은 특히 유용했다. 광고는 필요하지만, 결국 그것이 심어주는 두려움과 불완전한 행복에 대한 강요에 대한 이 책 속 글은 통찰력 있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보는 방식은 우리의 기존의 지식과 믿음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본다. 명화라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것이 ‘명화’라는 것을 알기에 ‘명화’로써 그것을 대하고 그에 합당한 감동을 한다. 어떤 작품을 보았을 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마음에서 “대단하다!”라고 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도무지 그 작품이 왜 그렇게 유명한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명화라는 타이틀 때문에 꼭 그건 봐두어야 할 것 같은 작품도 있다. 학창시절 미술책 속에서 만난 그림들을 보면서 나는 늘 그 작품들이 그렇게 유명해진 이유가 늘 궁금했다. 때때로 ‘나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작품을 볼 때는 뭔가 다른 게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생 때 처음으로 혼자 미술관에 갔을 때가 기억난다. 그때 나는 세상엔 정말 많은 그림들이 있으며, 결국 그 중에서 나의 가슴에 벌컥 와 닿는 그림이 내겐 진짜 명화라는 것을 깨달았다. 명화를 그린 작가이름과 작품 제목을 외우는 것보다, 어떤 작품을 만나든 있는 그대로 내가 느끼는 감상이 내겐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세상의 손꼽히는 유명한 화가들은 많은 경우 예외적인 화가였다.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시각으로 전통적인 기법의 요구에서 탈피하려고 했던 화가들이 그들의 독특한 시각을 인정받을 때 유명해진다. 그림을 정말 잘 그리는 사람, 기존의 것을 잘 모방하고 사진처럼 잘 그리는 사람은 완벽한 그림을 남겼을지 모르지만, 그림 잘 그리는 많은 사람 중의 한 명으로 흐릿한 기억 속에 이름을 남긴다. 하지만, 자기만의 기법과 생각으로 이전에 본 적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낸 사람은 관람자의 머릿 속에 선명하게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 결국 예술에 있어서 유명해진다는 것은 기존 것을 익히 알고 그것을 발판으로 그 이상의 것으로 도약한 사람에게 유효해지는 것이다.
똑같이 그림을 그리는 시대는 지나갔고, 사진 같은 그림은 이제 더 이상 큰 감동을 주지 못한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음을 흔드는 몇몇 작품들을 만날 것이고, 그때 그 예술가와 나는 특별한 소통의 관계가 된다. 그런 작품 몇이면 된다. 모든 작품을 이해할 수도, 이해할 필요도 없다. 내가 미술관 나들이를 좋아하고 일주일에 한 번쯤은 미술관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숨겨놓은 보물을 의외의 장소에서 만났을 때 느끼는 감동을 미술관에서 종종 경험하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작품을 만나, 복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되고 새로운 생각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며 감성이 풍부해지는 것이 내겐 너무도 소중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음 주에도 또 미술관에 갈 것이다. 새로운 생각을 만나고, 나 자신을 만나고, 타인을 만나고, 더 풍요로워지기 위하여.
집에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 콜 잇 러브(You call it love)’ OST는 오늘의 미술관 나들이의 피날레였다. 이것은 오늘 받은 덤이다. 아련한 감동의 선물이다. 학창시절 내가 쓰던 책바닥의 소피마르소 옆얼굴은 정말 예술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