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 플레이어 원 - 하위문화가 대중문화가 되는 순간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읽기 전에 주의 바랍니다.)
대중문화는 '사회 구성원 다수가 향유하는 문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 대중문화의 틀 안에서 다시 생산되어 나온 결과물들을 하위문화 혹은 서브컬처라 일컫는다. 쉽게 말하자면 대중문화는 우리가 문화를 분류하는 가장 큰 덩어리, 장르들을 의미한다면, 서브컬처는 그 각각의 장르에서 생산된 개별의 작품들과 그 작품에서 파생된 향유자들의 2차, 3차 생산분을 가리킨다고 보면 될 것이다.
상류층이 향유하는 문화의 의미가 강했던 하이컬처가 시대의 변화 속에서 서브컬처의 영역으로 내려오는 것은 이미 놀랄 일이 아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영화를 원작으로 한 소설, 클래식을 샘플링한 팝 등, 21세기의 문화의 영역에서 대중문화와 서브컬처의 영역으로 내려오지 못하는 하이컬처는 대중들이 쉽게 찾지 않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도망가고 있는 형국이다.
아이의 울음을 달래주는 뽀로로, 강남스타일의 조회수를 넘어선 상어 가족 등을 보면, 현대인의 사회적 문화적 자아 형성의 중요한 초석은 대중문화가 맡고 있음이 명백해진다. 정보의 홍수를 넘어선 '문화의 홍수'에 빠져있는 것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바로 이 대중문화, 그리고 그 대중문화가 뱉어낸 서브컬처에 기반을 둔 영화이다. 디스토피아로 그려지는 미래상에서 인간은 VR과 AR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으며, 현실의 게임 중독자들의 모습처럼 오아시스라는 게임 세상에 현실의 모든 것을 속된 말로 '꼬라박는' 인간 군상마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가 그리는 게임이라는 공간이 부정적인가?라고 묻는다면 '아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현실의 우리는 대중문화의 홍수가 키워낸 콘크리트 박스 안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의 홍수가 키워낸 존재라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이컬처가 더욱더 대중문화로 내려올수록, 계층의 분화를 심화시키는 아비투스(계급이나 계급 분파의 '관행'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며 지속적으로 생성력이 있는 원칙들을 말한다 - [고영복, 2000, 사회학 사전])를 허물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이기 때문에 오히려 대중문화의 발전과 하이컬처의 흡수는 모두가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가진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말하는 게임에 대한 메시지 역시 동일하다. '오아시스'라는 존재는 누구나 다 즐길 수 있고, 마땅히 즐겨야 할 존재로 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의 향유는 곧 유희의 향유이고, 유희의 향유는 유희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가 세상을 만들어가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호모 루덴스에게 있어 인간은 놀이하기 위해 존재하며, 놀이하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우리 인간은, 유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사람은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경험,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즉 서로 공유하는, 향유하는 핵심적인 문화들이 다르다는 것이다. 거기서 이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이 끼어들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 영화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이 캐릭터가 이 영화에 나온다'라는 것이다. 이 캐릭터를 모르는 사람에게 '아, 그 캐릭터 저 영화에도 나왔어'라는 대화가 가능해진다. 접점이 없는 서브컬처의 상징들이 이 영화를 통해 접점을 가지게 되며, 이 영화는 문화가 만들어내 흩어진 문화들을 다시 모아서 새로운 문화로 만들어낸 것이 된다. 그것이 소설, 영화 속 '게임'이라는 형태를 통해.
이는 게임이기에 가능한 등장 방식이며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서로 다른 분야의 서브컬처들이 게임이라는 형태를 빌어 영화 내에서 존재할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이 지녀온 문화를, 향유한 문화를, 그리고 자신을 키워준 문화를 투영하는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누군가는 이제는 기억 속에 잊혀 가던 회색빛 추억에 색을 덧칠할 것이고, 누군가는 지금 즐기고 있는 유희의 대상이 다른 존재에 투영됨을 통해 순수한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가 현대인이 쌓아 올린 수많은 문화가 탄생시킨, 각자가 향유하는 문화를 긍정하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게임은 종합 예술이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직접 움직이는 게임의 세계는 그 자체로 기존의 문화 분류들을 하나로 합쳐 생산되는 문화이다. 게임의 세계를 위해 소설처럼 새로운 세계관이 구성되고, 그 세계관을 바탕으로 게임 속의 컷신들을 위해 시나리오가 만들어지며, 이 시나리오를 채우기 위한 영상, 음성, 음악이 추가되며 이를 실질적으로 유저가 '플레이'함으로써 유희하게 되는, 수많은 영역이 합쳐진 새로운 영역이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게임'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마땅히 누려야 할 유희의 대상으로, 그리고 그 기회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지켜야 할 존재로 그려진다. 특히, 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플레이'라는 영역에 집중하고 싶다.
이 영화는 중간에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의 모습을 빌어 이야기를 진행한다. 여기서 샤이닝은 보여지는 것이 아닌, 체험하는 형식으로 분하게 된다. 3D로 구성된 영화의 세계 속에서 직접 영화를 '관람'이 아닌 '체험'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향유하는 대중문화가 궁극적으로 우리 삶에서의 '체화'의 영역으로 발전하게 됨을 의미한다. 진정한 유희는 인간이 직접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의 뼈대는 매우 간단하다. 디스토피아에서 하루하루 도피하는 주인공,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대기업의 음모, 그리고 그 대기업에 맞서는 피해자들. 그리고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 - '장시간 게임을 하면 몸에 해로우니 현실로 돌아가세요. 삶은 진짜 '진짜'에서 이어지니까'
물론 단점은 있다. 당신이 원하는 캐릭터는 너무나도 쉽게 소모되거나, 배경으로 지나가거나, 군중 속에 숨어서 보이지 않는다. 많은 IP들이 들어왔음에도, 컷 하나하나에서 그 캐릭터를 찾기엔 화면에 등장하는 정보량이 너무나 많다. 그래도 무슨 실망이 있으랴, 짐 레이너가 나오고, 트레이서가 나오고, 건담이 나오는데.
하지만 순수하게 이 영화를 보는 데 있어 내가 위에 언급한 내용들은 필요가 없다. 순수하게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SF 세상에서 보여지는 화려한 CG와 장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당신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서브컬처에 관심이 없더라도, 순수한 오락영화로서의 기능은 충실히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속된 말로 이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