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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golife May 22. 2019

결혼 2년 반, 결혼 추천 하냐구?

누군가 나에게 결혼을 추천하냐고 물어보았다.

결혼한 지 2년 반 정도가 지났다. 10월이면 3주년이다.

우리는 미국에서 결혼한 후, 1년 뒤에 한국에서 또 결혼식을 올렸었다.

한국에 자주 오기 힘들기에 짧은 시간동안 많은 분들께 인사하는 자리로써 결혼식을 올린 것이고, 미국에서의 결혼이 우리에겐 진정한 결혼식의 의미였다.


결혼 1년 후.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남편의 친구들과 내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남편의 친구 중 한명이 오늘 기분이 어땠냐고 물어보길래 곰곰히 생각해보고 대답을 했다. 많은 분들 앞에서, 그리고 부모님의 편지를 들으며 또 한번 눈물이 낫지만, 가장 크게 와 닿온 것은


우리 1년동안 참 잘 살아왔다.  


였다. 1년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영주권 절차를 밟으면서 하루 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고 크레딧 스코어 히스토리와 세금 보고 기간이 짧아 집을 구하기 힘들어 여러번 이사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아무리 떨어져있다 하더라도, 서로 다른 환경에 있던 새로운 가족을 대하는 것, 내 가족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이 없었다. 결혼과 이민.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들이 1년 안에 모두 일어났다. 내 생각같을 줄 알았던 남편은 결혼하고나니 남의 편일 때도 종종 있었고, 서로의 가치관으로는 절대로 논리적으로 풀어가기 힘들었던 사건들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기 바로 전에 영주권도 받고, 좋은 집으로 이사도 했고, 이직도 했다. 그렇게 잘 마침표. 아니 쉼표를 찍고 한국에 오니 (우려와는 달리) 한국에서의 생활이 행복했다. 만약 결혼 후 첫 1년간의 시간들이 절망적이고 힘들게만 느껴졌다면,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아빠의 손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나가기보다는 주저 앉아 펑펑 울며 결혼하고 싶지 않다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결혼식을 하는 내내 무표정을 짓지는 않았을까?


다행히 우리는 긴장되어 경직된 얼굴은 옆구리 한번 콕 찔러주면 팡 웃음이 터졌고, 남편과 나는 두 손을 꼬옥 붙잡고 앞으로도 이렇게 잘 살자고 서로의 마음은 전했다.

2년이 지나자 남편이 왜 남의 편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의 결혼식 이후, 우리는 바로 유럽 여행을 갈 계획이었지만 미국내에서 타주로의 이사. 즉 이주를 하게 되어 유럽여행은 결혼 기념일 3주년으로 미루었다. 이번주부터 가을에 갈 유럽 여행 호텔과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대략의 루트를 짜고 있는데 남편은 참 관심이 없다. 원래 여행 계획을 짜고 여행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란다. 하지만 여행지에 도착해서 나에게 물어보겠지? '우리 이제 어디가?'라고 말이다. 원래 혼자 여행다니더라도 계획을 짜던 나는 그냥 혼자 가는 셈치고 내 맘대로 계획을 세웠다. 차라리 내 맘대로 하니 이게 편하다.


결혼도 그랬을 것이다. 남자는 결혼에 대해서 상상하는 정도가 여자에 비해 약하다. 그저 내 옆에 아내가 있고 언젠가는 유모차를 끌며 우리 셋 또는 넷이 공원에 있는 상상을 하는 정도. 하지만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집에서 보는 가족은 항상 엄마가 있다. 아빠는 퇴근 후에 들어오긴 하지만 어쨌든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사람은 엄마다. 우리 엄마는 나와 오빠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고나서부터 일을 다시 하셨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엄마는 젊으셨을 때 일을 하셨고, 회사내의 가게를 인수해본 적이 있을 정도로 도전 정신도 강하셨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오빠를 갖고 바로 일을 그만두셨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서 엄마의 고부 갈등, 또 오빠에 대한 속상함을 듣는 건 딸이다. 친할머니, 할아버지는 나에게 둘도 없는 좋은 분들이지만, 엄마에겐 시댁이다. 딱히 나쁘게 하신 것도 없지만 며느리로서 역할을 다 하면서도 서운한 게 왜 없으셨겠나. 특히나 장녀로 살아온 엄마는 책임감이 강해서 먼 시골에 있는 친가도 자주 방문했다. 그 덕에 나는 자연을 자주 접했지만 엄마에게는 모두 책임일 뿐이었다. 그런 엄마가 차남의 아내로 둘째 며느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책임감이 투철하지 않은 막내 같은 맏며느리가 있었다. 둘 사이에서 승자는 맏며느리일 것이다. 어디서도 엄마는 정체성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장군같은 성격의 엄마는 사업가로 탁월한 사람이나 우리 아빠는 학자 스타일이다. '엄마'라는 역할 속에서 엄마의 끼를 발산할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엄마를 바라보며 자라온 우리 '딸'들은 당연히 결혼에 대해 심사숙고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결혼을 하면 시댁이 생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무슨 사건이 생기면 '결혼 전에는 안 그랬는데..' ' 여자가 들어온 다음..' 이라며 혹시나 며느리에게 책임을 전가시킬 수도 있다. 우리 부모님도 아닌데 부모처럼 모셔야 하고, 혹시나 대리 효도를 해야할 수도 있다. 우리 부모님한테도 자주 전화하는 것이 힘든데 그런 분들이 더 생긴다는 것. 게다가 아기를 갖게 되면 우울증은 당연히 따라온다. 게다가 나의 몸이 망가지고 체력이 떨어지고 몸이 아픈 것만으로 충분히 '희생'이다. 아기를 낳으면 육아에 대해 고민하는 쪽도 남편보다는 내가 될 것 같다.


이렇듯 여자에게 결혼은 막연히 내 옆에 남편이 있고 언젠가는 유모차를 끌며 우리 셋 또는 넷이 공원에 있는 상상을 하는 정도가 아니다. 1년간 결혼 생활을 하며 남편과 나 사이에 삐끄덕 거리는 모든 일들은 외부의 일들 때문이 아닌데, 자꾸 남편은 외부의 일로 그 원인을 돌렸다. 만약 부모님의 말한마디에 내가 상처를 받으면 부모님이 그런 말을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다. 남편과 나 사이에 일이다. 남편이 없었다면 부모님의 말한마디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남편에게 결혼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결혼이 나에게 어떤 상황을 만들어내는지 아주 가끔 이야기했다. (너무 자주하면 노이로제 걸릴까봐;) 그리고 며느라기 등 며느리 관련된 영화, 예능 등도 자주 보여주었다.


고부 갈등에 새우등이 아니라 고래등 좀 터져보니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는 판단할 수 없지만, 자신의 아내와 부모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남편은 괴롭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졌다고 할 수 있지만 새우가 고래 싸움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래 때문에 새우 싸움 생기는 꼴이다.  아내를 탓하면 자신의 가정이 깨지고, 부모님 욕을 하는 것은 차마 못한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을 탓할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본인이 잘 한다고 평화가 유지되는 것도 힘들다. 남편은 이제야 슬슬 그걸 깨닫고 있다. 본인이 새우가 아니라 고래라는 것을. 물론 어떻게 해결해야하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본인이 고래라는 것은 안다.


남편이 고래라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고 나서부터, 나도 고래에서 점점 새우가 되었다. 등이 터질 것 같으면 스스로 부모님과 멀어지고, 멀어진다고 또 뭐라 한소리 들을라치면 그때는 고래가 나설 타이밍이라는 것을 우리 둘다 안다.


무지하기 때문에 남편은 남의 편일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상황을 온전히, 아니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본인의 상상속에 들 푸른 초원 위에 돗자리 깔고 도시락 까먹으며 행복하게 웃고있는 가정을 만들려면 본인이 고래가 되어야 하고 고래인 본인 등이 터져야 한다는 걸...이제 알고 있다. 새우등이 아닌 고래등이 터지는 순간. 남편은 내 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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