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golife Jul 03. 2019

미국노예 생활을 피할 수 없던 이유

그 회사를 다닐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사실 나와 남편은 미국 인턴부터 이민까지 굉장히 잘 풀린 케이스다. 미국오기 전에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했고, 미국 온지 3년만에 영주권을 손에 쥐었고, 지금은 이직도 성공적으로 했으니 말이다. 미국에 오기 전, 소위 미국물 좀 먹어본 내 친구들은 뭐 하러 미국에가서 고생을 하냐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 중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미국노예생활'이었다. 기본적으로 미국에서 유학을 해본 그 친구들은 비자, 영주권이 미국 생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한인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워킹비자를 받는 것도 쉽진 않지만 워킹비자로 일을 하는 것은 노예생활이나 다름없고, 취업 영주권을 받으려면 더더욱 노예생활을 해야한다고.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친구들은 그들의 지인들이 실제로 미국에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미국 인턴/트레이니 비자를 갖고 한국에서 미국 일자리를 미리 구해가는 것이니 무슨 위험요소가 그리 있겠나 싶었고, 정 아니다 싶으면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한국이 싫어서 또는 미국이 너무 좋아서 가는 게 아니라 미국에서 일해보고 싶었고 다녀와서도 한국에서 내 몸 하나 건사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1년 반 미국에서 체류하며 돈을 받을 수 있는 J1비자를 받자 마자 미국으로 떠났다. 



진짜 지긋 지긋하다. 언제 망하니 그 회사.


미국 뉴욕에서 3년간의 생활을 하고 지금은 텍사스로 이주를 했다. '뉴욕에서의 3년' 이라는 시간은 내 인생의 갖은 풍파를 압축해서 겪은 기간이었다. 첫 회사에서 사업부가 없어질 위기 + 특정 종교의 어거지+ 가족 회사 의 못볼 꼴을 경험하고 이직을 감행했다. J1 트랜스퍼의 위험을 감수하며 이직을 했지만 거기서 더 크나큰 못볼 꼴을 경험했고 그때는 영주권 신청 중이었기에 버텨야만 했다. 지금은 퇴사한지 1년이 되어가지만 그 회사에서 영주권을 받고 나온 한 친구와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그 친구의 입에서 나오는 말. "진짜 지긋 지긋하다. 언제 망하니 그 회사." 딱히 누구 하나 미워하지 않고 고루 고루 인간관리 잘하며 지내온 그 친구는 그 회사 만큼은 망했으면 좋겠다는 저주를 퍼붓는다. 나도 그녀만큼 그 회사가 싫음과 동시에 애써 그때의 기억들을 상기하고 싶지 않아 "망하거나 말거나. 아우~ 신경끄자" 라며 받아친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그 회사에서는 일어났다. 정말 한국에서 가장 안 좋은 케이스 + 꼰대짓을 어떠한 법의 테두리없이, 가감없이 모두 하는 회사였다. 기존에 있던 직원 4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자나 영주권이 걸려있어 감히 회사를 상대로 평등한 대우를 해달라고 건의하지 못하는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점차 사장의 가족, 친인척, 지인들이 회사로 들어왔다. 겉에서 보기엔 회사 규모는 엄청나게 커지고 있었다. 미국 뉴욕에서도 이런 한인 회사가 없다 할 만큼 겉으로 보기에는 승승장구하는 회사였기에 나는 지인 추천을 받아 그 회사로 들어갔다.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지만 그 이상한 기운이 도는 회사에서 이 악물며 버텨야 했다. 그 회사를 들어가면서 영주권 신청을 했고 영주권을 받기까지 다른 직장을 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그리고 영주권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도 불가능했다. 아침 출근길에 울기도 여러번. 참을성없는 내가 어떤 끈기로 그렇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눈깔아 


그 회사의 이상한 기운이 단순한 기운이 아니라 '이상한 회사'로 명백해진 건 한 직원의 말이었다. 워낙 꼰대기도 했지만 우리가 아는 꼰대의 수준을 넘은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을 괴롭히기도 했고, 뒤에서 욕을 하면서도 앞에선 온갖 감언이설을 했다. 그게 사회 생활을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너무나 이상한 사x코라서 건들이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 사람이 점심시간에 사장, 부사장, 직원들이 모두 있는 가운데 새로온 직원한테 눈 깔으라는 말을 하는데, 아무도 제지를 하지 않는다. 나는 밥맛이 떨어져 곧 식사를 멈추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말을 해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 회사의 문화는 딱 그 수준에 머물러있었다. 하물며 부사장이라는 사람은 직원사이의 갈등을 부추기기도 했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녀본 나로서는 회사에서 한국말로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었고, 그 뒤로도 상식을 넘어선 일들은 자주 일어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거기서 그렇게 버텼을까 싶다. 사실 몇 달간은 일을 놓아도 될만큼 돈을 모아놨고, 남편도 일을 하고 있으니 그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구지 그 회사에서 남아야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여유는 '지금 생각해보면' 가질 수 있는 여유이다. 그 당시, 나는 혹시라도 영주권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컸다. 트럼프가 당선이 되자 비자, 영주권에 강한 압력을 행사했다. 인턴으로 함께 온 친구들 중, 나처럼 인턴 비자로 이직을 감행하다가 비자 트랜스퍼가 되지 않아 한달 이내로 한국으로 가야만 하는 상황을 겪은 친구가 있었다. 미국에서 어학원을 다니면서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한 친구는 학생비자로 바꾸다가 거절당해 한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서 1년반 정도만 있어도 미련없다던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영주권이 되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조금 더 자금을 모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영주권을 받게되더라도 우리의 결혼 자금에 조금은 더 힘이 되고 싶었다. 영주권을 받아 미국에서 계속 살지,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될지 모르는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뿐이다. 


미국에서 만나본 많은 사람들 중 대다수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닌 유학생이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학교를 나오고 일을 하다가 인턴비자로 미국에 온 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면 회사에 들어가 워킹비자 스폰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운이 좋으면 영주권 스폰도 받을 수 있었다. 나역시 인턴비자가 끝나기 전에 워킹비자 스폰을 받거나 영주권 스폰을 받아야 했다. 미국에서의 직장 경험으로 또 다른 국가에 가서도 일해보고 싶어 인턴비자로 미국을 온 나는, 지금까지 미국에서 다닌 한인 회사에서의 경험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미국 회사에 큰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글로벌 경험을 쌓고자 미국에 왔으니, 한국보다 더 한국스러운 한인 회사보다는 미국 회사에 발 한번 담궈보고 싶다는 희망을 안고 영주권을 받기를 고대했다. 영주권이 없으면 미국 회사를 가는 문은 너무나 좁다. 미국 회사는 기술직, 전문직이 아닌 이상 영주권 스폰을 거의 해주지 않으며 입사 지원을 할 때도 비자나 영주권에 대해 물어보는 란이 있으니 말이다. 


결국 내가 그 거지같은 회사에서 버틸 수 밖에 없었던 건 미래의 불확실성이다. 영주권 신청을 하며 불확실성의 끝을 본 나는 그런 상황일수록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더 매달릴 수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그때 일해서 번 돈은 쓰지도 않고 악착같이 모았다. 그 돈이 나에게 지금 조금의 여유를 주긴 하지만, 만약  그때 영주권도 잘 받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결코 그 회사에서 단 1분이라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미래의 불확실성이 나를 스스로 노예의 길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아까 말했듯, 유학생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는 않다. 비자, 영주권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걸 해결하기 위해 나처럼 노예의 길로 들어갈 수도 있다. 오히려 한국에서 사회 생활을 해보지 않았으니 그 회사가 아무리 이상하더라도 그냥 회사는 다 그런가보다 하고 일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좋은 동료가 가득한 회사들이 많다. 미꾸라지 판인 회사가 아니라, 단 한마리의 미꾸라지가 물을 어지럽히고 다니지만 여러명의 깨끗한 사람들이 그 물을 다시 정화시키는 그런 회사들이 아주 많다. 


지금 비자, 영주권 때문에 노예생활을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당신의 미래는 밝을 거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러니 너무 이 악물고 버티지 말고. 나는 곧 떠날테니 미꾸라지들아 안녕. 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조금은 가볍게 생활하라고. 그들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나라는 사람이 조금은 희망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싶기도 하다. 한국에서 한국 문화와 한국어가 더 익숙한 사람이지만 글로벌 환경에서 현지 사람들의 수준정도로 살아가는 그런 표본이 되어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제는 미국에서 재난까지 겪는구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