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톰 30분에 정전 3일. 전기가 나가면 물도 없다.
저번주 일요일, 오랜만에 남편이 오이 소박이와 깍두기를 해준다고 해서 장을 봐왔다. 나는 열심히 옆에서 재료 준비를 거들고, 소금으로 절이고 양념을 만들고 버무리는 건 모두 메인 쉐프인 남편이 맡는다. 남편은 혼자 느긋 느긋하게 핸드폰으로 무한도전을 틀어놓고 부엌이 자기만의 공간인냥 요리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두가지 요리를 한꺼번에 하고 아주 녹초가 되는 것을 여러번 보았기 때문에 남편의 손에 양념이 묻어 손이 묶여있을 때를 노려 남편의 공간에 뛰어 들었다. 덕분에 남편은 녹초가 되지 않았고 오후 3시 즈음 되어 깍두기와 오이 소박이를 만들어 냈고, 설겆이까지 모두 마쳤다.
그리고 장을 볼때 함께 사온 한국 과자를 3개나 까먹으며 영화를 보려고 하는데 날씨가 심상치가 않다. 20층에 사는 우리는 지평선까지 시야가 넓게 트여 이웃 동네뿐 아니라 옆 지역의 날씨도 볼 수가 있는데, 그 곳은 먹구름이 가득하고 비가 흩뿌리고 있다. 날씨를 보니 비소식은 없기에 저 비구름은 어디로 가려나 하고 신경쓰지 않고 영화에 다시 집중했다. 그런데 한 10분 지났나. 우리 집 주변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하더니 바람에 창가에 놔둔 식물이 휘어진다. 재빨리 창문을 닫자마자 창문이 흔들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바람이 심하게 불기 시작한다.
뉴욕에서 달라스로 이사온 뒤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날씨때문에 놀랐다. 텍사스는 덥다던데 (물론 여름이 아직 아니어서 그랬을 수 있지만) 바람이 강하게 불어 뉴욕보다 춥다고 느껴졌다. 대부분 하늘과 구름이 예쁘게 펼쳐지는 날씨를 자랑하지만 20-30분간 강하게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휩쓸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낮은 집들이 많은 이 곳 사정을 모르고 좋아라하며 고층 콘도에 사는 우리는 번개가 이곳 저곳 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며 한동안은 얕은 공포에 휩싸이곤 했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텍사스는 원래 이런가보다.'하며 적응해나갔다.
재난 1일째
지금 이 날씨는 좀 다르다. 창문이 마구 흔들린다. 통유리창이라 깨질것이 염려되어 남편도 창문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고 다시 부엌으로 숨어들었다. 비 바람이 어찌나 심하게 부는지 밖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20분 정도 지났나.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또 파란 하늘이 보이고 구름도 휩쓸려간 것처럼 말 그래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다. 이게 뭔 날벼락인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에어컨이 나갔다. 달라스에 온지 이제 6개월차인데 벌써 정전을 한번 겪은 바 있다. 우리집은 전기가 끊기면, 워터 서큘레이터를 쓰기 때문에 물도 끊기고, 전기 스토브를 사용하기 때문에 요리도 할 수가 없다. 화장실 물도 안 내려가고, 게다가 엘레베이터가 작동하지 않는 20층이란... 그 때는 한 3시간 집에 있다가 저녁 즈음 되어 집 밖을 나갔다. 그때도 강한 바람이 불었었기 때문에 집 밖을 나가니 나무가 꺾여져있고 여기저기 사이렌이 울렸다. 그런데 방금 휩쓴 바람은 그 때보다 심하다. 그때는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콘도 매니지먼트로부터 전기가 들어왔다는 메일을 받았고 엘레베이터를 이용해서 집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지금은 오후 5시. 과자를 먹어 배는 고프지 않아 다행이지만 매니지먼트로부터 내일 저녁 7시 반 즈음 전기가 들어올 거라는 메일을 받았다. 어쩔 수 없다. 저녁은 스킵하고 집에서 자고 내일 찜질방에 가서 씻고 일하러 가는 수 밖에. 인터넷이 끊겨 느린 폰으로 뉴스를 검색하는데 30만 가구가 정전이 났단다. 한국보다는 느린 미국의 시스템으로... 내일 저녁까지 30만 가구 수리가 가능할까.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잠을 청하는데 화장실도 가고 싶다. 모험하는 마음으로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물을 내렸다. 그게 마지막 물이었다.
재난 2일째
아침에 배변활동이 활발한 남편은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누가 참을 수 있으리) 그 후로 화장실에서 필요한 모든 용품을 남편이 가지고 나왔고, 나는 절대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찜질방부터 갔다. 예전에 그루폰으로 사 놓은 스파 이용권을 오늘 써먹을 차례인가. 남편은 회사 매니저에게 조금 늦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출근 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함께 찜질방에 가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목욕을 하고 나왔다. 저녁시간까지 용케 하루를 버틴 우리는 콘도 매니지먼트에서 혹시나 메일이 오지 않을까 매시간 확인했고 드디어 이메일을 하나 받았다. 7시 반이 예상 복구 시간이었는데 아직 복구가 되지 않았고 밤 10시 즈음 복구 하러 올 것이라고 연락을 받았으나 확실치 않다는 것. 그리고 뉴스에 보다시피 30만 가구가 피해를 겪고 있다는 것. 다른 주에서 인력을 지원받고 있다는 것. 내일 오후 5시나 아니면 그 다음 날까지 복구할 거라고 달라스 시티에서 발표했다는 것...
아니, 남편 회사의 동료 중 어느 누구의 집도 정전이 되지 않았고 찜질방도 잘 운영하고 있는데 대체 어디에 있는 30만 가구가 정전이 된 걸까... 우리 콘도에 30만 가구가 사는 것도 아니지만 아마 30만 이라는 숫자를 만드는 데에 많이 기여했으리라. 인터넷도 느리고, 편하게 잠도 못 잔 환경에 슬슬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그런 몸 상태로 아침 찜질방의 락스물에 몸을 담궈서 인지 남편과 나의 얼굴에 빨간 무언가가 토돌 토돌 올라오기 시작했다. (결혼하고 나니 트러블 생기는 것도 비슷하다.) 오늘은 집에서 씻고 편히 자고 싶은데... 어쨌거나 우리는 늦게까지 차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엘레베이터 전력은 예비 전력을 사용해서 작동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간 우리는 더 우울해졌고, 기분 전환을 하자며 다시 밖으로 나왔다. 길거리는 쓰러진 나무와 전봇대로 20분의 스톰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었다. 그래도 요즘 30도를 넘는 여름 날씨가 계속 되었었는데 오늘은 바람이 시원하다. 덥지 않아 땀을 흘리지 않으니 다행이라며 위로를 삼고 있는데, 남편이 어?! 어?! 하더니 우리집 콘도 몇 집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함께 환호를 지르며 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우리 집은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뭘까?!....밤이 늦어 확인할 수도 없다. 아침부터 찜질방에 가서 목욕 재개를 했으니 저녁은 씻는 걸 스킵하고 침대에 쓰러져 잠을 청했다.
그리고 재난 3일째 아침.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남편과 함께 남편 회사 근처로 갔다. 나는 주변 카페를 찾아 커피와 아침을 먹으러 갔고, 남편은 회사로 가서 오늘 상황을 이야기한 후 일은 밖에서 하기로. 이와중에 또 이쁜 카페는 찾았다. 1시간....30분 정도 지나자 큰 카페지만 눈치가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 하루 종일 이렇게 눈치를 보며 장소를 옮겨다녀야 할까? 렌트 보험을 갖고 있던 나는 렌트 보험에서 호텔 비용을 커버하는지 검색해보았고 아마 커버해주는 듯 하다. 호텔을 갈까.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남편이 와서 남편 타를 타고 돌아다녔다.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가서 조금이라도 쉬기로 했다. 호텔을 가려면 짐도 좀 가져와야 했다. 그 사이 콘도 매니지먼트에서 이메일이 왔다. 각 층마다 차가운 물을 비치했고, 냉장고에 있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줄테니 매니지먼트 팀이 집으로 들어가도 된다는 사인을 해서 메일로 달라고. 대부분 미국인들은 신발을 신고 들어오고, 수리를 하러 올때면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게 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왠만하면 수리도 우리가 알아서 하는데, 밖에서 신고 다닌 신발을 신고 집으로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 내 냉장고를 여는 것은 더 싫었기에 아직 이메일을 보내지 않고 있었다. 집에 가서 냉장고는 내가 알아서 확인하고 버려야지라는 생각으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서 무얼 챙겨야 하는지, 공포의 화장실에서 무얼 챙겨하는지 (남편에게 줄) 리스트를 작성하며 집에 도착했다. 어?! 그런데?!! 주차장 출입구가 작동한다. 이것도 예비 전력으로 하는 걸까? 아님 전기가 들어왔나? 어제의 설레발이 실망으로 이어진 게 너무 강력해서 오늘은 기대를 갖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호텔로 가는 거다. 그리고 지하 주차장에서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이런 날.....이사를 오는 집이 있다....엘레베이터가 되서 다행이지... 3개의 엘레베이터 중 1개를 이사용으로 쓰고, 나머지 2개 중 하나가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엘레베이터가 내려오질 않는다. 이사용 엘레베이터를 써야 하는건가?? 그러던 중 매니지먼트 직원이 오더니 몇분만 기다리라고 한다. 급히 다른 곳으로 향하는 그녀에게 전기가 복구 됬냐고 희망없는 질문은 남편이 던진다. 남편의 설레발은 어딜가나;;;;
'지금 방금 들어왔어!'
그녀에게 땡큐를 외친 건, 우리가 이 집 계약이 성사된 이후 두번째인 것 같다. 니콜 땡큐!!!!
우리는 부지런히 함께 대청소를 하고 냉장고 정리를 하고, 에어컨을 키며 전기를 만끽했다. 요즘 술도 잘 안 마셨는데 오늘은 맥주가 땡겨 남편이 맥주를 사러 나가고 나는 라면을 끓였다. 불과 3일 전에 만든 오이 소박이는 너무 익었고 깍두기는 적당히 익었다. 그래도 남편의 오이 소박이는 버릴 수 가 없다. (또 안 해줄까봐;;;;) 익은 오이소박이 활용법을 찾아 남편에게 다시 한번 오이소박이를 만들 수 있게 격려?를 했다.
오늘은 정말 행복해서 잠이 잘 오질 않았다.
미국에서 재난 3일을 겪은 후기는 다음 글에 써야겠다. 정말 별별 일을 다 겪는다. 우리는 집에서 쫓겨난 게 이번 사건 뿐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