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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golife Dec 29. 2018

넌 미국에 있으니까
시월드에서 자유롭잖아?!

한국에서 살던 비혼 주의자가 미국에서 한국 사람과 결혼하다. 

사실 난 한국에서 비혼 주의자였다. 친오빠의 결혼식 날짜가 정해지고 나서 엄마한테 한 첫마디. 


엄마! 난 결혼 안 할 거니까 결혼하라고 하지 마요~~!

'오빠' 다음은 '나'라는 생각에 부모님께 이미 선을 그었다. 우리 엄마는 딸이 멋지게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하는 커리어 우먼으로 살기를 바라시는 분이시고, 아빠 역시 딸바보로 알려지신 분들이라 나의 당찬 선언을 동의하듯 웃어주셨다. 솔직히 나는 결혼을 하고 싶었다. 아니,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 생활을 꿈꿨다. 그러나 결혼에 따라오는 모든 제반사항들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웨딩드레스 조차 나는 한번도 입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아니 솔직히 그 공주같은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 앞에 걸어간다는 것조차 싫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함과 동시에, 또 나처럼 결혼 생각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결혼 한 친구들은 자신의 시월드에 대해서 결혼을 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결혼을 한 친구들끼리는 터놓고 자주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러다 결혼한 친구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모임만 하더라도 슬슬 시월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엄청나게 다이내믹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드라마에서 보던 일들을 내 친구들이 직접 겪으니 그것은 곧 나도 겪게 될 이야기로 와 닿았다. 결정적으로 여자 친구와의 결혼을 생각하는 남자 사람 친구들이 여자 친구가 겪어보지도 않은 시월드를 너무 걱정한다고 할 때마다. 아, 이건 또 뭔가?! 더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할 것을 예상했다. 한국에서 결혼은 힘들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내 남자라면 그러지 않을 거라고. 절대 그러지 않을 남자를 만날 거라고 착각을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미국에서 왠 한국 남자?!


지금은 남편이 된 이 남자는 한국에서 미국 인턴을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고 꿈돌이, 꿈순이 같은 성향 때문에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어쩌다 같이 뉴욕이라는 지역으로 인턴을 오게 되면서 종종 뉴욕 이곳저곳을 함께 구경하고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땐 위로도 해주는 사이가 되었다. 외국에서 사람을 사귀는 것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던 나는 아무리 아는 사람일지라도 사귀는 단계까지 가기에는 큰 산들이 있었다. 사람을 사귀게 되면 그 사랑에 빠져 가족 하나 없는 외국에서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없는 환경에 빠지는 게 싫었다. 그리고 이제 30대가 되어 연애관도 조금씩 생기다 보니 나와 잘 맞는 사람을 더 신중하게 만나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이 남자는 한국 사람이다. 게다가 나는 30대이고 이 남자는 아직은 20대. 미국 인턴은 사회 초년생이라고 절대 여겨질 수 없는 걸 알기에 아무리 마음이 가더라도 사귀는 건 막막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지금까지 살았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모습들이 존경스웠고, 그 부분들은 내가 배울 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꿈을 가지고 도전을 하는 면에서는 또 나와 잘 맞았다. 서로 신중한 태도로 사귀기를 시작했고, 우리는 인턴 비자를 가지고 이직을 감행했다. 인턴 비자를 갖고 이직을 하는 것은 쉽지만도, 어렵지만도 않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였지만 어쨌거나 리스크는 도사리고 있었다. 주변에 어떤 사람은 이직을 하다가 비자가 끊겨 한국으로 갔고, 대부분 인턴들이 이직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인턴으로 일했던 회사는 80-90년대의 한국 문화를 갖고 있는 회사였기에 나는 이곳에서 1년 반의 내 세월을 보낼 바에야 한국으로 가는 것이 낫다며 이직을 감행했다. 그리고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도 이직할 곳을 한번 찾아보라고 권유하였고 이직을 하지 않고 1년을 미국 한인 회사에 있는 것은 정말 중요한 시기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차라리 한국으로 빨리 돌아가서 취업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별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서로의 인생에서 그게 베스트라고 생각했다. 

자주 바꾸는 것보다 한 곳에서 우직하게 일하는 성향의 남편은 나의 말에 귀 기울여 이직을 도전하였다. 이게 나에게는 결혼을 결정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였다. 아무리 도전하는 데에 두려움이 없는 성격이어도 개인마다 두려운 상황들은 매우 다르다. 더욱이 남의 말을 듣고 그 두려운 상황을 맞닦드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에게 이직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남편에게 어떤 곳을 떠난다는 그 결심은 굉장히 큰 일이었다. 나의 의견을 그만큼 존중해주는 사람이라면 인생을 같이 해도 되겠다는 마음을 먹은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리고 우리는 둘 다 영주권 스폰해주는 회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같이 인생을 꾸려가도 좋겠다는 남자가 옆에 있고, 미국에서 영주권까지 받을 수 있는 기회가 함께 주어졌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미국 이민 생활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기쁨이 컸다. 우리는 미국에서 부모님께 결혼 이야기를 어떻게 말씀드릴까 고민했다. 사실 좀 자신 있었다. 우린 자신 만만했다. 우리 힘으로 미국에 와서 영주권을 받아 이민 1세대로 살아가는 환경을 만든 것. 그리고 그만큼 노력한 것. 우리는 정말 자신 만만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이기 때문에 더 잘 보이고 싶고 더 잘해드려야지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부모님들은 '정적', '놀람'에 이어 굳은 얼굴이 보였다. 그렇지... 사실 우리는 직접 뵙지 못하고 화상 통화로 결혼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영주권 절차를 밟고 있는 입장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미국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물론 그 절차를 다 밟고 한국에 가서 직접 뵈었더라면 좀 덜 놀라셨겠지.. 이해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너무 서운하고 억울했다. 


나를 미워할 이유는 전혀 없잖아. 
나 정도면 능력 있고 생활력 강한 괜찮은 사위, 며느리 아닌가? 


사실 처음 말씀드렸을 때부터 이해해주실 거라고 생각한 건 우리의 착각이었다. 그 착각을 간직한 채 첫 통화를 하였고 그 굳은 얼굴을 보았을 때, 마치 시부모님이 '나'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런 사람과 어떻게 웃는 얼굴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가 결혼을 하면서 집을 사 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 우리끼리 잘해나갈 수 있다고.. 우리는 정말 자랑스러운 자식들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짧은 시간에 '서러움'과 '서운함'이 깊어졌다. 원래는 같이 통화를 자주 드리며 말씀도 자주 나눌 생각이었지만 첫 통화 이후 따로 각자 부모님께 통화를 드리기로 하였다. 나의 부모님과의 갈등은 어떻게든 내가 해결할 수 있지만 '남'과는 그게 잘 되지 않으니까... 그렇게 각자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분에 대해서 서운함이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각자 부모님께 터놓고 이야기를 하면서 부모님도 금방 마음이 풀리셨고 오히려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있으셨던 것 같다. 마음이 풀리셨을 즈음 2번째 통화를 시도했다. 


너희 미국에 살거니?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미국에서 둘이 열심히 똘똘 뭉쳐 사는 우리들을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생각하실 줄 알았다. '결혼'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부모님께서 생각하신 건 '얘가 정말 미국에서 살 거구나.'라는 사실이었다. 이번에는 우리의 말문이 막혔다. 우리는 부모 곁을 떠나는 '결혼'을 넘어서, 한국도 떠나겠다고 했던 거였으니.. 부모님 마음이 어떨지는 생각도 못했다. 그저 예쁘게만 봐달라고 응석 부리던 자식들이었다...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일이 풀렸다. '그래, 먼 타국에서 너희들 둘이 잘 이겨내서 열심히 살아보거라. 부모가 지켜봐 줄게. 너무 힘들면 언제든 한국으로 와라.'라는 부모님의 마음과 '부모님 죄송합니다. 부모님 걱정 덜 끼쳐드리도록, 자랑스러운 자식들 되도록 열심히 살게요.'라는 우리의 마음이 서로 와 닿았다.  

비혼 주의자가 미국에서 결혼한 이유. 비혼 주의자가 미국에서 결혼한 이유.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떨까?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솔직히 미국에 있기에 결혼을 더 빨리 쉽게 결정할 수 있었던 게 사실이다. 미국에서 똘똘 뭉쳐 함께 인생을 잘 헤쳐나갈 수 있는 배우자. 같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에 이 사람만 보고 결혼을 결정할 수 있었다.


한국에 살지 않기에 명절증후군도 없고, 매주 주말에 시댁에 불려 갈 일도 없다. 그리고 명절에 오지 않는다고 욕을 들을 일도 없다. 오히려 미국 홀리데이때 둘이 뭐하고 놀지, 여행을 갈지, 집에서 콕 박혀 영화를 보고 맛난 걸 먹을지 우리는 항상 들떠있다. 그리고 나를 낳으시고 키워주신 분들과는 다른 분위기, 다른 말투를 쓰시는 분들이지만 이제는 나를 좋아해 주시는 게 표정에서도 느껴진다. 우리 부모님들처럼 말이다. 

우리 역시 자주 못 뵙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더 통화하려고 노력하고, 통화를 하면 더 밝은 얼굴로 인사드리려고 한다. 한국에서 뵙고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뵙기 전에 전화로 들었다면 서운했을 법한 말씀들도 지금은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오해할 일도 없다. 혹시라도 상처 받는 일이 생기더라도 잠시 전화를 드리지 않으며 나의 마음이 진정될 즈음 연락을 드려도 뭐라고 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럴 땐 오히려 남편이 전화를 드리지 말자고 하니까. 


우리는 자주 '한국에 가서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솔직히 나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오히려 남편이 더 자신이 없단다. 지금처럼 우리 둘. 서로에 집중할 시간도 적어질 것 같고, 어쨌든 간에 더 많이 만나니 부딪히는 면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 있으니 시월드에 대해서 훨씬 덜 겪고 있으나, 가끔은 부모님이 해주시는 김치를 받아오며 돈을 드리거나, 김장 도와드리며 힘들다고 남편과 티격태격도 해보고 싶고, 명절에 두 집을 왔다 갔다 하며 남편에게 한풀이도 해보고 싶다.........라고 생각하다가도. 아니, 솔직히 싫다. 


지금 우리 둘. 이민1세대로서,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으로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힘이 많이 든다. 그저 각자의 인생을 저녁마다 와인 한잔하며 서로를 위로해주고 힘을 주는 지금. 그리고 우리 둘의 미래를 함께 그려가는 지금이 행복하다. 우리의 목표 중 하나는 한국에 1년에 한 번 가든, 아니면 부모님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1년에 한 번 하는 것. (그 정도 하면 1년에 한 번씩 약 2천만 원이 깨진다..) 그 정도의 능력을 만드는 것이 진심으로 우리가 부모님들께 드리고 싶은 선물이자, 우리 스스로 진정으로 부모님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내가 최선을 다 하는 것. 내가 다치지 않게 어느 정도 바운더리를 치는 것. 아무리 미국에 있더라도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왠지 전화도 매주 드려야 할 것 같은 '착한 며느리' 강박에 시달렸지만, 이제는 잘 누리고 있다. 타국에서 누리는 꿈돌이, 꿈순이. 둘만의 결혼 생활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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