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피천득의 <인연>이란 수필이 있다. 좋아하는 그 수필을 읽을 때면 목젖 부근이 뻐근하다. 아사코와 '나'의 이루어지지 않는 인연이 마음 아프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 맺음과 이어짐에 대한 성찰을 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선생님과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만났다.

우리 학년을 가르치지 않았던 선생님이 우연히 보강 시간에 들어오셨고, 잡다한 문학 이야기를 늘어놓으시다가 중학교 때 글을 쓴 적이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꼭 가져오라는 말을 남기셨다. 중학교 때부터 낙서장에 글을 끄적거린 경험이 있었던 나는 장난삼아 몇 개의 노트를 선생님께 보여드렸고 그날 이후 선생님은 기꺼이 나의 멘토가 되어 주셨다.


단지 글을 쓰고 같은 장르를 탐색한다는 이유만으로 선생님과 나는 한 팀이 될 수 있었다. 우리가 속한 문예부는 주말마다 산으로 들로 글감을 찾으러 다녔고 중학교 때도 문예반이었던 나는 고등학교 3년도 내리 같은 반에서 활동했다.



그 시절 문학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습작 기간이 길지 않았던 내가 내리 몇 개의 상을 휩쓸고 교내외로 조금 유명해졌을 때, 선생님은 내게 문학에 대해 말해주셨다. 문학은 목숨을 거는 어떤 것이어야지 액세서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늘 사람 좋게 허허 웃어 주시던 선생님이 정색하고 하신 말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뒤로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지 모른다.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던 제자를 문병하기 위해 몇 번씩 병실에 들르셨던 선생님. 밤늦게까지 병실에 머물러 무언가를 들려주시던 선생님. 그리고 야밤에 찾던 네 잎 클로버.

평생 소설 쓰는 일을 멈추지 않겠노라며 웃음 짓던 선생님은 그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으로 문단에 등단하셨다.


선생님은 몇 년 후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셨고 나는 예전에 선생님이 그러하듯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우리는 일 년에 서너 번 만나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고 전화로만 안부를 묻기도 하며 새해를 맞기도 했다. 내 결혼식장에서 선생님은 그 사람 좋은 웃음을 날리기도 하셨고 사이사이 쓴 글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했으며 시 낭송회를 겸한 문학의 밤을 주최하기도 했고 원고를 교정 보고 책을 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시간이 흘러, 나는 어느새 나를 만나던 시절의 선생님보다 더 나이를 먹었다.

돌아보니 무척 빠른 시간이었다.


친구들과 선생님 댁에 세배 간다며 나섰던 어느 추웠던 겨울.

선생님 댁은 버스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만 하는 곳이었고 한복을 맵시 나게 차려 입은 우리가 견디기에 겨울 바람은 매웠다. 삼십 분 이상을 걸었을까. 버선발은 차갑게 얼어 들고 치마 속으로 기어드는 바람의 치근덕거림을 견디며 도착한 선생님 댁은 무지하게 따뜻했다. 이불 속에 언 발을 녹이고 떡국 한 그릇을 맛나게 먹고 우리는 사모님을 뵈었다. 김이 후끈거리는 방 안에 사모님과 한 아이가 있었다.

선생님의 둘째 딸이었다.


세월이 흘러 선생님의 머리 위에도 드문드문 서리가 내리던 날, 둘째 따님의 청첩장을 받았다. 신부는, 모든 신부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름다웠다.

조금 일찍 간 나는 선생님께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안산에 있다가 학교를 옮긴 후로 몇 년 만에 뵙지만, 손을 잡고 반갑게 웃는 선생님의 미소에서 지나간 세월이 한꺼번에 묻혔다. 어느덧 나도 그때의 선생님처럼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올해 팔순이 되셨다.


<인연>에서 작가는 아사코와 세 번 만났으나 세 번째는 아니 만나는 게 좋았노라고 말한다. 우리의 인연도 아마 그럴 것이다. 너무 넘치거나 모자라거나 아니면 너무 늦거나 빨라서 이어지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좋은 인연을 저버리기도 한다.


나에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나와 인연을 맺은 지인들과 아름다운 끝을 보는 일이다. 아름다운 시작은 많지만 아름다운 끝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어느 여름날 밤, 선생님과 내가 병원 마당 풀숲에서 가로등 불에 네 잎 클로버를 찾았던 것처럼 나는 아름다운 시작과 끝을 아름다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고 싶다.

선생님이 계셔서 내 삶이 빛날 수 있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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