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를 앞둔 금요일. 지난 피로가 누적돼 체력이 급소진되는 오후. 이럴 때는 찐한 다방 커피가 제격이지, 하며 막 마시려던 찰나, S가 나를 찾아왔다.
연휴 지나고 바로 시험 시작이니 질문이 있어서 그런가 했는데 아니었다. 간이 의자에 앉자마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요즘 아이들은 속을 잘 내비치지 않고 다가가 관심을 보일라치면 손사래를 치며 가까이 오는 것을 거부한다.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그 이상은 접근을 불허하기에 언제부턴가 아이들이 나를 부르기 전에는 의도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다.
초임 때. 아이들의 문제는 나의 문제로 생각해서 하루내 문제를 껴안고 살았다. 시간이 흘러도 문제가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나의 고민만 깊어져 갔다. 뭔가 분주한 일상을 보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던 시절을 거치며 나는 아이들의 문제와 나의 문제가 같지 않음을 알았고 무조건 어떤 사안에 깊게 개입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아이의 문제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겹치게 되면, 문제가 해결된 뒤에도 뭔가 찝찝함이 남았다. 그건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 미진함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개입하지 않는다, 요청이 오면 개입한다. 그것도 최소한으로’이다.
아이가 다짜고짜 울 때, 그냥 내버려 둬야 한다. 울고 나면 카타르시스라고 있지 않은가. 저절로 감정이 정화될 때가 있고, 울고 나서야 왜 울었는지 곰곰 생각해 보며 울게 된 환경을 돌아보고 스스로 교정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달기 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던 아이는 감정이 진정되자
“시험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느라고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아요.”라고 문제의 원인을 짚어낸다.
또 공부 문제다.
도대체가 왜 아이들은 이렇게 성적에 대한 고민이 많은가. 인생의 하고많은 고민 가운데 오로지 성적, 대학 진학, 공부에만 집착하고 있으니 한국의 고등학교는 수많은 프로고민러 양산 집합체 같다.
사연도 거의 비슷하다. 중학교 때는 그런대로 성적이 좋았다. 그래서 부모님도 기대하셨고 고등학교에 와서 처음 시험 전까지 수업 내용도 별로 어렵지 않아 잘 볼 거라 기대했는데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처음이라 적응이 안 되어 그러거니 했는데 2차 시험까지 성적이 나오지 않자 밥도 안 먹히고 잠도 못 잔다는 것.
아이의 얼굴은 어둡고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학기 초 반짝이던 눈동자, 해맑은 미소가 사라진 게 아쉽고 안타깝다. 그러고 보니 방학 날, 복도에서 만났는데 표정이 어두워 무슨 고민이 있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아니라고 부정하더니 개학이 되고서도 고민이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진심을 담아 묻는다.
“S야, 뭐가 제일 걱정이야?”
“학원도 다니고, 숙제도 꼬박꼬박하고 매일 늦게까지 안 자고 공부하는데 성적이 오르지 않아요. 미칠 것만 같아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정말 할 말이 없다. 평소 수업 태도가 좋고 반듯하며, 교사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하며 정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아 왔기에 공부를 더 하라거나, 더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다만 공부 방법에 대해 평소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자는 얘기만 했다. 다른 과목은 지도할 수 없지만, 국어 과목에 한해서는 시험이 끝난 후에 차근차근 점검하고 대책을 세워보자고 말할 뿐.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부모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 S의 마음을 더 짓누른다. 부모님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기대에 못 미쳐 죄를 지은 것 같고 요즘은 숨 쉬는 게 힘들다고 한다. 부모님이 기대를 조금 낮추시면 어떨까, 물어보니 외동이라고 한다. 외동의 특성상 부모의 모든 지지와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한편, 부모의 기대에 하염없이 부응해야 하는 단점도 있다.
게다가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부모 세대는 ‘하면 된다’ 시대와 맞물려 있다.
할 수 있다는 과도한 신념이 사회에 화석처럼 굳어져 있어서 ‘할 수 없음’과 ‘하지 못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전보다 조금 깨지기는 했어도 아직도 단단한 그 화석 앞에 우리 아이들은 길을 잃는다.
해도 안 되는데 부모와 사회는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말한다. 더 열심히, 더 최선을 다하면 아니,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하면 할 수 있다고 한다.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고.
주변에 마음이 힘들어 지쳐가는 아이들이 늘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나도 화석의 일부분으로 충실한 역할을 할 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마음이 아프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할까, 고민해 본다.
사실 중고등학교 6년만 빡빡하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들어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면 그런대로 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다. 문제는 그 짧은 시간의 성과가 평생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는 근원이 된다는 점이다.
이게 과연 정당한 것일까. 논의의 시발점은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물론 그중에는 스스로 열심히 공부한 아이도 있겠지만 순간의 운이나 환경적 요인에 의해 만들어진 경우도 많다. 순간적인 불운으로 원치 않는 결과를 얻은 아이들이 더 많은 현실에서 그들이 평소 노력을 하지 않아서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고, 나는 말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은 성실하게 공부하고 공부한 만큼 성적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상대평가가 여전히 존재하고 고등학교 수업이 대학입시를 위한 전제조건일 때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받는 학생들은 늘어날 것이다. S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했지만, 학년이 올라가고 시험이 거듭될수록 좌절과 패배감으로 시간을 메우게 될 것이고 급기야는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게 된다.
학생들이 행복해야 학교에 가는 것이 즐겁다.
학교생활이 즐거워야 교사도 행복하다.
모두의 행복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일까. 더는 아이들이 방황하지 않고 행복하게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길, 미래 교육은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