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에 교사에게 개인 PC가 지급되었다. 공동 PC를 사용해 문제를 내다가 각자에게 데스크톱을 제공하니 신세계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컴퓨터의 사용으로 인해 이상할 정도로 개인 시간이 사라져 버렸다. 손으로 업무를 하던 시절, 일과 중간에 교정을 거닐거나 차 한잔을 마시며 옆자리의 선생님과 담소할 여유가 있었다. 앞앞이 데스크톱이 놓이고 저마다 자기 컴퓨터에 얼굴을 묻고 업무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게 되면서 누군가와 담소는커녕 혼자서 하늘을 보며 계절을 느낄 여유마저 사라져 버렸다.
2000년대 초에 개인 노트북이 지급되었다. 무슨 업무가 그렇게도 많았는지 한동안 무거운 노트북 가방을 들고 다녔다. 게다가 2001년에는 종합교육 행정정보시스템(NEIS) 시행을 앞두고 논란이 일었다. 우선 명칭에서도 '나이스'로 부를 것인가와 '네이스'냐로 갈렸다. 당시 나이스를 반대하던 입장은 학생들의 개인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이 매우 크고 유출된 정보가 악용될 우려가 있으며 교사의 업무량이 증가한다고 주장했다. 또 소설 ‘1984년’에서처럼 정부가 빅 브러더가 되어, 이 시스템을 통해 우리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기에 이를 반대한다고 하였는데 그 시절 이런 이야기로 학교는 흉흉했다. 학교 현장은 나이스를 둘러싸고 찬반으로 나뉘어 격렬한 대결이 이루어졌지만 2003년 나이스가 결국 시행되었다.
이 시스템을 도입하기 전에는 수기로 ‘생활기록 일람표’를 작성하였다. 규격은 A3 크기였다. 일명 장판지로 알려진 이 일람표를 작성하는 것이 담임 업무의 어려운 일 중 하나였다. 장판지는 학기 초에 학급 인원수에 맞춰 한 장씩 배부된다. 담임은 그 종이에 학급 학생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붙이고 인적 사항을 적고 성적을 기재하고 일정한 칸에 학생의 학교생활이나 지금의 행동 발달사항을 손으로 기록한다.
성적은 기록하고 나면 검증을 거쳐 수정할 수 없게 테이프를 붙이고 가장자리에 도장을 찍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종이를 다시 받기 힘들고 수정도 할 수 없으니 오타가 생기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록한다. 그러나 인간의 일이 어디 그런가. 오십여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기록하면서 틀리지 않는 게 더 이상한 법. 혹여 틀리기라도 하면 처음부터 다시 쓰는 방법이 합리적이나 성적이 기록되어 있거나 학년이 누적되어 있으면 수정은 아예 불가능하다.
학생이 1학년이라면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지만(그것도 성적이 기재되기 전에만) 2학년이나 3학년이 되어 모든 학년의 기록이 완결된 상태에서 글자를 틀리게 적게 되면 모골이 송연해지기 마련이다. 나도 정성을 다해 썼지만 틀렸다. 고민하다가 미술 선생님의 날렵한 칼로 도움을 받은 적이 한 번 있다. 조심스럽게 칼로 오타 부분을 잘라내는 방법인데 종이의 두께는 얇아지는 단점이 있다. 최선의 수정 방법이기에 솜씨 좋은 미술 선생님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이스가 출발하고 나서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는 획기적으로 달라졌다. 중간에 오타가 생겨도 예전처럼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아도 된다. 내용과 분량이 늘어난 만큼 중요성도 나날이 높아졌다.
요즘 교사들은 학기 말 생기부(生記簿)를 쓰느라 ‘생(生)을 기부(寄附)할’ 정도가 되었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아무리 써도 기록할 것은 많았고 일은 줄어들지 않았다. 고등학교 3년 동안 학생이 한 활동 중에서 학생의 진로와 가장 적합한 내용을 골라 개별 기록을 해야 한다. 힘들어도 한 학생의 인생이 걸린 일이 아닌가.
늦은 밤, 학교에 남아 추위에 곱은 손가락을 주무른다. 세모를 앞둔 날. 손을 분주히 놀리지만 따라오지 못하는 머리를 탓하다 고개를 들어 지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본다. 어딘가에 연결된 줄을 따라 손을 움직이고 내리는 나와 학생들, 주변의 모습이 보인다. 교사들은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생을 기부하고 있다. 아이들은 미래를 향해, 아니 생활기록부에 한 글자라도 더 좋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달리고 있다.
설마 우리가 마리오네트는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