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네 허름한 골목을 들어서면 우리 집이 보였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업이 기울고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던 부모는 모든 것을 팔아 빚잔치를 하고 고향을 떠나 서울 변두리 작은 동네에 짐을 풀었다. 이사를 한 곳은 이름만 집이지 예전에 살던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선 방이 하나밖에 없었고 부엌도 너무 작아서 식사 준비를 하는 어머니가 몸을 돌리기에도 비좁았고 거기다 셋집이었다.
돌산이 병풍처럼 두른 채석장 마을. 우리가 이사한 곳이었다.
날마다 멀리서 돌 깨는 폭약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면 동네는 소음에 온몸을 떨다가 한참 뒤에야 진정이 되었다. 동네 위쪽에 있는 채석장에선 날마다 돌 깨는 소리가 저녁 늦게까지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럴 때마다 먼지가 풀썩이며 집으로 날아들었고 입속에서 가루가 씹혔다. 돌가루가 날려서 그런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아이들은 돌가루가 날릴 때, 그 속으로 냅다 달려가며 자신의 용맹을 자랑했다.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동네였다.
고향의 큰 집, 아름드리나무가 있던 마당은 이제는 꿈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집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배고픈 동생들은 어머니가 끓여주는 수제비라도 더 먹으려고 수저를 가져다 댔지만 나는 한술도 먹지 않았다. 다 풀어진 풀죽 같은 수제비는 사람이 먹는 음식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넓은 마당에 놓인 평상에서 소꿉놀이하며 어머니가 튀기고 있는 도넛을 기다리던 그 시절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눈을 감고 있으면, 달콤한 설탕으로 범벅된 갓 튀겨낸 따뜻한 도넛과 버터로 살짝 바른 작은 튀김과자가 눈앞에 삼삼한데 눈을 뜨면 허여멀건 밀가루 죽이 보였다. 꿈인가 해서 눈을 몇 번 껌뻑여 봐도 사라지지 않았다. 밥을 먹지 않는 딸을 걱정스레 보던 어머니가 그중에서도 형체가 온전한 것을 골라 먹음직하게 그릇에 담아줬지만 끝내 먹지 않은 이유는, 나는 수제비 따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종의 선민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도넛을 먹던 아이니까.
전학을 간 새 학교는 내가 사는 곳보다 훨씬 밑에 있었다. 그곳은 나름 평지였고 학교 주변에는 이층 집들도 몇 채 눈에 띄었다. 학교에서 가방을 메고 터덜터덜 집으로 올라가는 길목 평지에 예전 우리 집과 비슷한 집이 있어서 나는 일부러 그곳을 통과해서 집으로 가곤 했다. 옛집의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아서였다. 걷다가 그리움이 목까지 차오르면 잠시 벽에 기대어 눈물을 삼켰다. 돌아가고 싶었다.
그날도 벽에 기대어 하염없이 옛 생각에 젖어 있었는데 철 대문이 열리며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여자애가 나왔다. 하필이면 얼마 전에 내 짝이 된 아이였다. 순간 나는 그 아이가 볼까 봐 고개를 돌리고 집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늦었다. 등 뒤에서 그 애가 나를 불렀다.
“어머, 너 희주 아니니? 집이 이쪽이야?”
그 애의 다정한 목소리에 가던 길을 멈추었지만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그날따라 구멍이 난 양말에 스웨터 올이 풀어진 소매가 더 꼬질꼬질해 보였다.
“우리 집 여기야, 바쁘지 않으면 들어올래?”
들어가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오늘 갈아 신은 구멍 난 양말 때문에 집에 일이 있다고 둘러대었다. 다음에 꼭 들르라며 그 애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공연히 부아가 나서 길 한가운데 있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엄지발가락이 엄청 아팠다.
이십 년이 훌쩍 지나 들른 그곳은 예전과는 달랐다. 고층 아파트들이 키를 재듯 들어선 곳에 있는 학교는, 건물에 포위된 섬 같았다. 내가 집으로 가던 길에 있던 석희네 이층 집도 아파트로 변해 있었다.
이층 집 원피스 소녀. 혼자서 가만히 불러 보았다.
그녀의 이미지는 시간이 지나도 잔향이 오래 남는 향수 같아서 걸음을 옮길 적마다 향기가 새롭게 돋아났다.
넘어진 곳에서 일어난다고 했던가. 아버지의 일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면서 산동네에서 조금 아래 동네로, 단칸방에서 두 칸으로 옮겨가는 동안, 억눌렸던 나의 자존심은 조금씩 회복되었다. 어느 날, 상기된 얼굴빛의 아버지가 문서 하나를 손에 들고 오셨다. 어머니의 얼굴이 활짝 핀 것으로 보아 좋은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다음 달에 우리는 석희네 옆, 이층 집으로 이사했다. 마당이 제법 크고 옹골찬 나무들이 멋스러움을 더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석희를 만나도 고개를 숙이거나 외면하지 않아서 좋았다.
“옆집 소식 들었어요?”
“응. 그러잖아도 아까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어. 그 집을 사지 않겠냐고.”
“그래서 당신은 뭐라고 했는데? 살 거예요?”
“글쎄, 사정이 딱하기는 하지만 시세보다 그리 싸지 않아서 어쩔까 생각 중이야.”
“사람 일, 참 모른다더니 동업자 잘 못 만나서 한순간에 집이 거덜이 나네요. 그나저나 사람들은 좋았는데.”
같이 사업을 하던 동업자가 공금을 횡령한 후 자취를 감추고 곧이어 석희네도 이사를 했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사 가던 날, 비가 내렸고 화사한 원피스 차림이 아닌 운동복을 입고 있는 그녀를 차마 바로 볼 수 없어서 이 층 내 방에서 지켜보았는데 차를 타기 전 집을 한번 둘러보는 석희의 시선과 잠시 엇갈리긴 했다. 나를 보았을까. 나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