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들은 것을 비교적 오래 기억했다. 요즘은 들으면서 잊어버린다. 메모를 하지 않으면 하루의 일정, 챙겨야 할 물품, 소소한 일상 등을 잊기 일쑤이다. 몇 년 전, 가정폭력 상담에 대해 장시간 연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들은 내용 중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에 대해 잠깐 적어보기로 한다.
요즘 내가 배우고 있는 내용은 가정폭력 상담원이 되기 위한 교육이다. 오늘은 신경정신과 개원의가 강의를 하였다. 이름하여 '가정폭력 피해 여성의 정신의학적 후유증'이다. 아침부터 비는 엄청 내리고 집으로 가고 싶은 욕망을 억지로 누른 것은 순전히 제목이 주는 이끌림이었다.
가정 내 폭력의 주된 핵심 주제는 <권력과 지배력>이다. 특히 배우자에 대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학대가 오늘의 주제였고 우리나라에는 정확한 통계자료가 나와 있지 않으나 미국의 자료를 보면 25-30%의 여성이 적어도 한 번은 결혼기간 내에 남편에게 맞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만 그럴까? 사람 사는 모습이 거기서 거기라면 우리나라도 정확한 통계가 잡히지 않아서 그렇지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해 남편들은 대부분 아내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자신의 왜곡된 남성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왜곡된 욕망을 갖고 있다. 이런 남편들의 의도는 아내를 자신에게 온전히 의지하게 만들려고 하며 그를 통해 남편의 의견이 곧 그 가정의 법이 되게 하고 그가 심하게 학대하거나 폭력을 사용해도 그것을 감수하게 한다. 이것이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력이며 지배력이다.
피해자는 대부분 (50% 정도가) 폭력가정에서 성장하여 그러한 환경을 피하기 위해 일찍 결혼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가해 남편의 곁에 머무르는 아내들의 특징은 의존성이다. 아내들은 알게 모르게 그녀의 존재감을 남편에게서 찾고 누구의 아내라는 정체감을 갖는다. 자신의 남편이 아무리 폭력적이라 해도 그것은 남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결함이 있어 생기는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드러내지 못하고 은폐시키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경계선이 불분명하고 가족 간에 엉켜있는 경우이다.
오늘 내가 흥미를 느낀 개념은 바로 이 경계선이다.
경계선이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의 벽과 같은 것이다.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의 한계를 경계선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어느 한 개인이 한 손을 뻗어 원을 그릴 때 그 반경이 그 사람의 경계선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것은 그 사람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그 누구도 그곳을 함부로 들어서거나 허물 수 없다.
예컨대 아이에게 성교육을 시킬 때 경계선의 개념으로 설명하면 훨씬 쉽다.
아이에게 팔을 벌려 그릴 수 있는 원의 넓이를 보여주고 그 부분은 너만이 가지는 고유한 영역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 영역에 들어오고자 한다면, 심지어 엄마와 아빠라도 양해를 구해야 한다고 말해준다. 만약에 누군가가 너의 경계선 안으로 들어와 너를 만지려고 할 때 그는 허락을 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너는 독자적이고 너만의 고유한 영역을 가진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해 준다면 아이는 경계선의 개념과 건강한 경계선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가폭 가정(가정폭력가정)의 피해자는 대부분 자기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거나 모호하다. 가족과 엉켜있거나 아니면 동일시하거나 불분명함으로 인해 건강한 자신의 자존감을 확립하지 못한다고 한다.
살아가면서 건강한 경계선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며 또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더 이상 그런 행동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아주 작은 결심이 시작될 때 한 사람의 무너진 경계선은
비로소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에 고름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마음속의 고름을 짜내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흉터는 물론 남을지언정 감정과 생각, 의식의 경계선은 비로소 그 형태를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