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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시대가 오는가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할까

by Y One

‘무정부시대가 오는가’의 저자 로버트 카플란은 내가 특히 좋아하는 사상가다. 그는 미국 국제정치학의 현실주의 전통 속에서 힘의 논리를 강조하는 보수적 사상가이지만, 동시에 지리의 중요성을 설파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번 책은 앞으로 닥칠 여러 격변 속에서 어떤 위협이 다가올 수 있는지, 또 현재 체제가 가진 약점이 무엇인지 그의 시각에서 풀어낸다. 25년 전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설득력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놀랍다. 이번 글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저자 임명묵 씨가 언급한 2장 ‘민주주의의 허실’ 부분을 중심으로 인상 깊었던 내용을 짚어본다.


79p -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모두 민주주의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민주주의가 늘 사회를 보다 문명된 곳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80p - 직장을 구하지 못한 튀니지의 한 학생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튀니지의 실업률은 25%나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선거를 실시하면 이웃 알제리에서처럼 폭력사태가 일어나고 원리주의 정권이 들어설 것이다. 먼저 경제를 살려야 한다. 선거는 나중 문제다."


82p -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중산층과 문민제도라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민주주의를 도입한 러시아(가)... 폭력사태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옛 소련 정권으로부터 그 두 가지 요소 중 어느 것도 물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실패해온 이유의 적어도 일부분은 민주주의 도입에 있고 중국이 성공해온 이유의 적어도 일부분은 민주주의 거부에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 내 주장의 요점이다.


84p - 민주주의는 여타 사회, 경제적 성취 위에 얹혀질 경우에만 성공한다는 얘기다... 유럽 사회는 복잡성과 세련도의 측면에서 민주주의를 도입할 수 밖에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85p -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을 보라. 소련 붕괴 후 도입된 민주주의는 민족주의자들을 권좌에 앉혔으나 양국 지도자들은 전쟁으로 치달았다... 미국 건국의 시조들은 교육 수준이 낮은 일반 대중이 크롬웰 같은 선동가에게 속아넘어갈 가능성을 우려하며 한 사람에게 과다한 권력을 부여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극력 회피했다.


87p - 애당초 관료제도가 제대로 작동해본 적이 없는 사회에 민주주의는 취약한 연립정부와 무의미한 타협을 강요함으로써 국가 기능을 약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민주주의는 국가를 만들어내지도, 튼튼하게 해주지도 못한다. 다당제는 소득세를 내는 중산층과 효율적인 관료제를 이미 갖춘 나라, 또 국경선이나 권력 공유 같은 근본적 문제들이 이미 해결돼 있어서 정치인들이 예산 같은 부차적인 문제들로 한가하게 입씨름이나 할 만한 나라에 적합한 제도다.


88p - 사회 안정은 중산층의 확립에서 비롯된다. 중산층을 잘 키워내는 것은 민주체제가 아니라 군주제 등 권위주의 체제다. 중산층이 어느 정도 규모가 커지고 자신감을 갖추게 되면 자기 계층의 존재와 번영을 가능하게 해준 바로 그 독재자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94p - 제프리 삭스에 따르면 '좋은 정부'란 부정부패, 책임 회피, 재산권 침해, 관료주의적 비능률 등으로부터 국민을 지켜주는 정부다.


99p - 민주주의에 요구되는 사회 발전 수준은 매우 적은 지역에서만, 그리고 그런 지역에서조차 역사상 특정 시기에만 존재해왔다.


이 책은 민주주의가 경제력이 부족하고 교육받지 못한 대중이 많은 사회에서는 좋은 정치체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상황에서 투표권을 부여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려 하면, 오히려 폭력 사태와 혼란이 불가피해진다는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의 상반된 결과가 대표적이고, 알제리나 아제르바이잔처럼 민주주의 도입 이후 더 큰 파탄에 빠진 사례도 많다. 결국 제도주의적 관점에서 민주주의가 보편적 가치로 강조되는 현실을,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은근히 비판하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요즘에는 민주주의가 이미 정착된 선진국에서도 위협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MAGA 세력, 한국에서 드러나는 양 진영의 극단적 적대감은 민주주의 자체를 불안하게 만든다. 내 생각에 이는 단순히 경제력이나 교육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 심화, 소외된 집단과 이들을 이용하려는 신진 정치인, 지식인들의 정체성 정치가 맞물린 결과 같다. 이런 흐름에 대해 카플란이 어떻게 진단했을지 궁금해진다.


비록 50쪽 남짓한 짧은 분량이지만, 책은 압축적으로 많은 경고를 던진다. 25년 전의 교훈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 읽어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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