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양철학사는 꽤 재미있게 읽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현대철학 앞에만 오면, 책장이 아니라 핑계가 먼저 넘어간다. 처음엔 단순히 어렵거나 취향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유는 조금 더 구조적인 것 같았다. 내가 철학에서 기대하는 기능이 분명한데, 현대철학은 그 기대와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이다.
내가 철학에서 기대하는 기능은 두 가지다.
첫째, 철학이 세상의 원리나 이치를 이해하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되느냐다.
이 기준에서 보면, 나는 철학 전반에 꽤 회의적인 편이다. 솔직히 말하면 세상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 철학보다 과학이 훨씬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근대철학까지는 납득이 간다. 개인, 권리, 법, 국가 같은 개념들이 지금의 사회 질서를 만드는 데 직접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철학으로 오면 자꾸 이런 질문이 든다.
이 사유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 있을까.
존재, 해체, 담론 같은 개념들이 현실을 더 명확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걸까, 아니면 오히려 더 흐리게 만드는 걸까.
이럴 때마다 나는 “차라리 과학이 낫지 않나”라는 생각으로 빠져나온다.
둘째는 사유의 폭이 실제로 넓어지는 경험이 있느냐다.
철학을 읽다 보면 가끔 관점이 이동하는 순간이 있다.
“아, 이전 사람들은 여기까지밖에 생각할 수 없었겠구나.”
그리스 철학을 읽을 때, 근대철학을 읽을 때, 그리고 니체를 만날 때 그런 감각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현대철학에서는 그 느낌이 잘 오지 않는다.
아직 현재진행형이라서 그런 걸까.
물론 이게 내가 현대철학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여전히 “설명해주는 철학”, “정리되는 철학”을 기대하고 있고, 현대철학은 그 기대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지도 모른다. 확장이라는 감각을 아직도 ‘더 멀리 보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현대철학을 잘 읽지 않는다.
게을러서라기보다는, 아직은 내가 철학에서 원하는 기능과 맞지 않아서다.
언젠가 시간이 충분히 지나 이 사유들이 하나의 구조나 서사로 보이게 된다면, 그때 다시 돌아올 수도 있겠다.
어쩌면 현대철학을 안 읽는 지금의 나는
무지한 독자일 수도 있고, 아직은 설명받고 싶은 인간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인지는, 솔직히 아직 모르겠다.